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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2. 2017

'환경미화원' 같은 기자를 꿈꾸며

어떤 언론인이 될 것인가

기자 절대로 못한다고 했다. “왜 그렇게까지 단호하냐”는 질문에 나한테는 흔히 기자 정신이라고 불리는 투철한 무언가가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뼛속까지 소시민적인 사람이라는 말도 덧붙여서 말이다. 교수님은 그 말을 듣더니 상담일지를 고쳐 적으며 코웃음 치듯 대답하셨다. “너는 기자라는게 무슨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줄 아냐?” 벌써 1년 전 에피소드다. 언론과는 절대 인연이 없을 거라 장담했던 내가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내게 있어 기자란 ‘환경미화원’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설득시킨 사소한 생각의 계기가 있었다.
   
언론은 때때로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 침묵하거나, 충분히 말하지 않거나, 너무 많이 말할 때 그렇다. 그럴 때면 내 피는 말의 거품을 걷어 진실을 유통시키고 싶다는 열망으로 조용히 끓어오른다.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기를, 혹 피할 수 없는 아픔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처한 진실에 비례하는 아픔만을 온전히 책임지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인 줄을 알기에, 거품 없이 각자에게 배당된 진실의 몫을 분별할 수 있는 정확하고 간결한, 기자의 훈련된 문장과 심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직업에 내가 부여한 의미와 책임의 크기에 비해 내 마음은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그것은 마땅히 ‘독립운동가’의 마음 정도는 타고난 사람들만이 짊어질 수 있는 꿈인 듯 보였다.

‘독립운동가’는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념에 투신하며, 필사적인 투쟁을 벌인다. 마치 죽기 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세상에 필요한 단 하나의 질문’을 완수하겠다는 듯 때로는 절박하게, 때로는 숭고하게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명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며 그 결과물을 원동력 삼아 전진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이 완고한 태도가 때론 그들이 대중을 한낱 계몽의 대상으로 치부하도록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과, 한편 대의라는 핑계로 보도윤리를 위반하는 일부 기자들의 행태 또한 잊지 않고 지적될 필요가 있다.

물론 부당한 사실에 대한 폭로는 언론의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론이 혐오와 불신을 조장하지 않는다는 독자들의 신뢰가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2016년 발간된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 신뢰도는 5점 척도에 2.89점, 조사 대상 26개국 가운데 23위에 그쳤다. 이런 언론불신의 토양에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기 힘들 것이다. 신뢰란 만드는 게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다. 내가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대가 나를 기꺼이 믿어줄 때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뜬금없게도 ‘환경미화원’ 같은 언론인이 되고자 한다. 마치 매일 새벽마다 묵묵히 거리를 쓸어내는 미화원의 일상적인 비질 같이 경건한 근면함으로 내 나름의 진실에 대답해보고 싶다. ‘독립운동가’들이 열정에 휩싸여 세상을 바꾸는 각자의 투쟁에 집중할 때,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벽 출근길 위에 함께하는 문제에 매달리는 게 내 몫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강철 같이 단단한 심장보다는, 독자를 겁낼 줄 아는, 세상 그 누구의 것보다도 얇고 물렁한 내 소시민적인 심장에게만 주어진 역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내가 언론인이 돼야 하는 이유란 침묵하거나, 충분히 말하지 않거나, 너무 많이 말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란 것, 그 사실이 이유라면 이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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