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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우리, 집

일 년간의 고시원 생활을 끝마치며

가축이 사육된다. 침대를 제외하면 팔굽혀펴기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공간이다. 화장실이 합쳐져 있는 방에 달린 한 뼘 짜리 창문을 그나마 위안 삼는다. 내가 둘러봤던 다른 방에는 변기 혹은 창문이 없었다. 둘 다 있는 곳은 당연하게도 요구하는 월세가 어처구니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학교와의 거리를 다소 타협하는 대신 나머지 요소를 충족하는 편이었던, 그 우리처럼 퀴퀴하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나는 일 년을 살았다.
     
불만은 없다. 제 발로 걸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굳이 유감스러우려면 수은주의 천장을 모르고 솟아올랐던 올 여름의 온도계 정도일거다. 내 방이 얹혀있던 옥탑의 얄팍한 외벽으로는 유독 더웠던 한낮 36도에 육박하는 땡볕 아래 익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달아올라 찜통이 된 방 안에서 내가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할 때 쯤 간신히 숨이 트일 정도의 냉방을 정확히 제공해주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만은 없다. 서울 내 대학 인근 고시원에서 35만원 월세로는 그 정도 서비스가 수지 타산이 맞겠거니 하기 때문이다.
     
입주하기 위해 방을 둘러볼 때 굳이 몇 평인지 셈해보지 않았다. 고시원에 들어가 살기로 결심한 이상 방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 대신 최대한 삶의 조건들을 챙겨 본다. 물은 잘 나오는지, 창문과 화장실은 딸려있는지, 주방과 조리도구, 음식들은 위생적으로 제공되는지를 말이다. 화재 시 탈출 경로도 살펴본다. 보온과 냉방을 손해 보겠지만 꼼짝없이 불타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옥탑으로 결정했다. 덕분에 문을 열고 나오면 나름 전망도 괜찮았다.
     
그래봤자 좁은 건 좁은 거고, 여긴 좁아도 너무 좁다. 이루기로 목표한 것이 있으니 감내해보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 또한 미래의 나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만다. 사실 생긴 것으로만 치자면, 아파트나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다 똑같은 ‘우리(cage)’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다르다. 고민 끝에 고시원에서는 먹고 자고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능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고, 목적을 위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 ‘우리’와 ‘집’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2호선 성수역과 건대입구역의 정확히 중간에 위치한 이 곳에는 학생보다는 공장에 다니는 아저씨들이 많은 편이다. 확신까지는 무리겠지만 복도에서 얼핏 스치며 확인하는 행색이나 새벽 같은 시각 여러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는 생활패턴, 무엇보다도 성수동 공장지역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추론이다. 그 분들은 출근 때나 퇴근 이후에나 옥상에 놓인 담배 깡통 옆에서 말없이 담배 피우기, 소곤소곤 벽을 뚫고 넘어오는 TV 소리 정도 이외에는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한 이웃을 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지간히 이 곳 생활에 익숙해졌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바닥에 몇 개 떨어져 있지도 않은 옷가지를 정리한다고 책상과 침대 위로 발 디딜 곳을 간신히 확보해가며 방정리를 끝냈을 때였다. 뭐 대단한 거 한다고 아크로바틱씩이나 강제하는 협소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옥상으로 나와 성수동을 관통하는 도로 위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눈으로 쫓으며 담배 두 개비를 말없이 다 태웠다. 아, 문득 내 위로 겹치는 그 아저씨들의 뒷모습. 협소한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압박감이, 그 협소함으로 인해 정리한다고 정리가 되지 않는 그 불가항력적인 번잡함이 내 정신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몸을 돌릴 수도 없게 꽉 짜인 격자모양의 철창 사이에 닭 한 마리, 어쩌면 돼지 한 마리가 끼어있었던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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