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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4. 2017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문학적' 일까?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1/3)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의 서두는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다. 일반적인 설명문과 문학을 읽는 방법의 차이에 대해 예시를 들어주는데 어쨌든 문학의 언어들은 '섬세하게 읽'히지 않고서는 절대 그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숨겨진 의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세히 보라는건 특별한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간단한 진리를 항상 놓치며 살아간다.

쉽지만 어려운 얘기니까, 문학적인 것들이 아예 '저 문학적이에요'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서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것들에만 대고 '섬세하게 읽기'를 하면 될텐데.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을 문학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문학적인 것의 목록이 길어질 수록 번거로움의 크기 또한 그에 비례하여 커지기 마련이다. 진짜와, 키치와, 쌈마이들이 서로 뒤섞여 난교를 벌이고 있는 세상이다. 편리함을 원한다면 적당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에 상당하는 댓가를 지불하고 주체적인 판단의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그러나 문학 작품만이 문학적인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이태원으로 처음 놀러갔던 날 군자역에서 스쳐갔던, 조금 묘사해보자면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불특정 다수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던 볼품없는 행색의 할아버지는 문학적이다. 그의 삶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길래! 그러나 같은 대상을 놓고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판단은 전적으로 내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다. 이 불쾌한 할아버지를 문학적으로 읽을만큼 한가한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임 교수님께서 내게 학자를 뜻하는 'Scholar'의 어원이 '한량'에 닿아있다고 했구나 싶다.

내가 사랑하는 너, 그리고 너, 그 옆의 너도, 그리고 나 역시도 명백히 문학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과연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을까. 얼마냐 문학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언제나 잠재적인 상태일 뿐, 누구나 누군가에게 '꽃'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동시에 김춘수가 될 수는 없고, 모든 들판의 꽃이 '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모두가 모두에게 충분히 문학적일 수 있는 그 날이 올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슴으로 울면서도 아프지 않을 수 있겠지. 울기도 전에 서로의 눈가를 닦아줄 수 있겠지,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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