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를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2/3)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제법 유명한 문장이다. 저렇게 뎅겅 잘라놓고 보니 언뜻 애절한 사랑의 고백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기대와 달리 이 편지는 곧바로 구겨져 버려진다. 사실 저 문장은 맥락 상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온전하게 발을 붙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한 욕망이 쏟아 놓은 토사물'이라고 읽히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자기 위선적 토사물의 불쾌함과는 별개로 그것은 언제나 파편적이나마 인간으로서 회피할 수 없는 나름의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산다는 건 어쩌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진실의 토사물'을 견디며 살아가는 일은 아닐까. 인간을 이해하며 살아가고 싶다면 말이다.
나는 무엇을 토해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천착해온 나만의 질문은 무엇인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나하나 짚어가며 따지기에 벅찰 정도로 숱한 사건들의 연쇄들, 그 속에서만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우연의 누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만 같았던 과거의 시간들을 지금에서야 천천히 되짚어봤다. 그렇게 돌이켜 보건대 내가 이끌렸던 모든 것들의 중심에는 '소통'이 있었다.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 존재를 갈구하고, 그와의 간극을 절감하며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고통 그 이상의 것이 내게는 항상 있어 왔던 것 같다. 주체할 수 없는 표현욕구의 기저에 자꾸 소통의 본질을 갈구하게 만드는, 어떤 헛헛한 결핍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를 도저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의 부끄러운 결과물들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괴롭게도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확인할 수 있는 건 그저 소통의 불구성을 증거하는 단서들 뿐이었다. '말해질 수 없는 것', '충분히 말해지지 않은 것', '너무 많이 말해진 것'만이 끊임없이 입으로부터 귀로, 그것들이 다시 또 다른 입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의 귀로 옮아 다니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소통의 문제는 자연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사회-경제-역사에 걸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니 내가 혼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다. 다만 그럼에도 이 문제를 도저히 떨쳐낼 수 없으니 언제나 말을 더듬고, 어리버리하고, 복장이 터져야 할 운명을 감당할 수 밖에 없다. 이게 바로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에는 "누군가를 악마화하거나, 이론적 개념으로 환원하려는 유혹에 쉽사리 빠지지 않도록 내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야 한다"는 작은 결론을 내렸다. 대상을 규정하기를 머뭇거리는 동안 그것에 대한 조금 더 정확한 상(像)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어떤 결심을 내리기 위해서는 판단의 중지가 필요하긴 하다. 모든 대상에 대해 언제까지고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불완전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첫 인상을 끊임없이 수정하며 살아가는 편을 전략적으로 택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의 다양한 차원에서 '판단 중지'는 더 이상 불가피한 것이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이런 경향은 이데올로기화 되어 적극적으로 추구되거나 권장된다.
멀티태스킹이 권장되는 사회, 수많은 푸시알림, 포털 사이트와 SNS를 통해 쏟아지는 무지막지한 정보들.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걸러내기도 바쁜 상황에서 고상하게 '판단 중지'를 수행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는 허영심이나 무능력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전시사회의 전형적 부작용으로 인해 단순히 편향된 일부의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 생각하기를 섣불리 그만둘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확신을 갖게 되기도 한다. 디지털 디톡스 개념이나 가짜뉴스 문제는 우연히 나타난게 아니다. 우리가 논란과 루머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다른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도망간 뒤, 고슴도치가 된 어느 몇몇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문제도 있다. 당연히 행동 그 자체는 결코 문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타인으로부터 당당히 독립하겠다"는 구호 아래, 그저 도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손쉬운 거부를 주체적인 인간상으로 포장하는 자기 기만은 분명히 문제적이다. '시민 평등에 기반한 개인주의'를 손쉽게 이기주의나 유아론으로 치환할 뿐더러, 종종 상품화되어 '의식있고 쿨하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상'을 전시하고 싶은 이들에게 판매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경제와 기술의 급격한 성장, 그로 인해 증가한 기술적 소통의 가능성이 반드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보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한병철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시간은 미세한 시간의 덩어리로 끝없이 쪼개져 간다. 이런 일상 속에서, 타인들이 쏟아내는 '진실의 토사물'이 과연 단순히 역겨운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갈수록 소통이라는 것이 불가능을 향해 다가가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타인에 대한 포기가 곧 내 자신에 대한 포기이기도 하다'고 굳게 믿고 싶다. 기왕에 그럴 것이라면 어리버리한 내 자신을 차라리 긍정하고 싶다. 왜냐면 "대화란 언제나 의외의 방향으로 엇나가기를 좋아하니까", 그럼에도 기어코 모두를 이해하고 싶은 나의 미련한 '판단 중지'로 인한 '어리버리'니까. 부끄럽기보다는 그건 내게 차라리 서로에게 '문학적'이고자 했던 이에게 주어지는 훈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