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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7. 2017

'오차 없는 모델'을 꿈꾸는 사람들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3/3)

현실은 쉽사리 이론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다만 일부를 움켜쥘 수 있을 뿐이다. 이론이 간신히 움켜쥔 현실의 파편이 얼마나 큼직한지를 따지는 척도가 모델의 설명력이다. 비단 학문의 영역만을 따지고자 하는게 아니다. 우리는 각자 세상을 해석하는 나름의 틀을 가지고 있다. 이 틀은 세상을 일부 적절하게 설명하기도, 다른 일부에 대해서는 설명에 실패하기도 한다. 모델이란 모름지기 현실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히 왜곡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이론이건간에 오차항이 반드시 꼬리처럼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차항의 절대적인 존재감은 '겸손의 강제'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받아 들여질 수 있을 듯한 이 인식적 제안은 현실적으로 쉽게 무시된다. 어쨌든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델의 내적 일관성에 심취해 현실 정합성, 그러니까 오차항의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무시해버리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현상을 해석하는 자신만의 틀이 정교해질 수록 내적 일관성이 높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적 일관성이 현실과의 정합성을 희생한 댓가라면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경제 이슈에 대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시장지상주의자들은 모든 경제적 문제의 해결책을 시장 메커니즘으로 환원시킨다. 예컨대 시장은 실패하지 않으므로, 정부가 불필요하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대공황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자본들의 효율적 분배는 물론이고 합리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한 단계 더 밟고 나아가면 시장 친화적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경제적 주체들을 선동된 무지렁이들로 악마화 시키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들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다. 문제는 오차항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류 경제학은 노동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부불경제의 작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부불경제의 대표적인 예시는 가사노동, 봉사활동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시장 외부의 자리에서 작동하지만 시장 내부의 요소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제학은 이들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규명하려 하지 않는다. 비주류 경제학에 해당하는 깁슨과 그레이엄의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의문점과 함께, 자본주의에 의해 은폐된 비자본주의적 존재들에 대한 폭로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다. 이 이론이 학문적으로 성립하는 순간 시장지상주의의 오차항으로 충분히 참고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과 노동이 최적의 균형을 따라 이동한다는 이론에 대한 맹신 또한 예시로 들어볼 수 있을 듯 하다.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개인은 자신의 경제적 후생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자본의 유입과 유출이 가격 변동을 발생시킨다는 사실, 자본이 노동보다 훨씬 탄력적인 재화라는 사실은 자명한 사실이다. 클릭 한번에 거대 자본이 전세계적으로 이동하고, 기업의 정체성이 국적을 초월한 세계화 시대에 노동의 주체는 미세한 점 하나보다도 못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잘 것 없이 축소된 노동의 주체가 사실은 숨 쉬고, 먹고 싸고, 자고 일어나고, 울고 웃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은 발이 묶여 있는 채로 자본만이 족쇄를 풀고 세계를 활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교과서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자본과 노동의 서로 다른 위계질서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세계 경제가 통합되었다든가, 지구촌이 하나의 경제권으로 들어왔다든가 하는 식의 짤막한 서술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만약 노동자가 어떠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알맞지 않은 조건이라면 좀 더 나은 조건을 제안하는 타 국가로 자유롭게 이동하여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으로 마땅히 옮아가야 한다. 물론 우리의 노동은 자본만큼 세계화 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이론처럼 시장은 최적화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인류의 거대한 정치경제적 시도가 있었다. EU 통합과 유로화 출범이다.


그럼 모든 국가가 단일통화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개발도상국의 원죄도 사라지고, 외환 보유고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글로벌 불균형도 없어질 수 있다. Robert Mundell은 최적통화지역(Optimum Currency Area) 이론을 주창했었다. 국가들이 서로 인접해있고, 상호간에 무역거래가 많고, 각국 간에 노동이동이 활발한다면 이들은 단일통화를 사용할 수 있는 최적통화지역 이라는 것이다. 단일통화 도입으로 환율 급등락의 비용을 줄인다면 경제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킨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론적 배경으로 유로화가 탄생하였다. Robert Mundell은 '유로화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유로화가 도입된 1999년에 노벨경제학상도 수상하게 된다.
- http://joohyeon.com/m/post/113


당시 유로화를 지지하던 경제학자들은 최적통화지역 이론을 근거로 통합된 유럽 경제가 누릴 효용성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08년 유럽경제위기라는 형태의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각 지역의 금리가 자동으로 최적화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인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노동은 태생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의 이동은 한 인간의 거주지를 이동한다는 것이고, 공간의 이동은 그를 둘러 싼 관계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즉, 노동자는 스스로의 조건을 최적화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이 일방적으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손실이 존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를 매번 같은 이론에 쉽사리 대입하며 답변한다면 그건 인간의 사유가 아니라 기계적인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모델의 설명력은 100%가 아니고, 반드시 오차항을 포함한다. 삶에 적용되어야 할 이론이라면 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야 한다. 일관성 있는 설명의 아름다움은 매혹적이지만, 그러한 환원에 유혹에 빠져서는 타인을 단순히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거나, 악마적인 어떤 것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이해의 포기이기에 다시 한 번 "'어리버리'와 '판단중지'의 상관관계"라는 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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