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장충기 문자 폭로' 사건
천 번을 흔들리고도 응석받이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 누구든 어른이 된다. 소득은 정체성이다. 지갑 속 돈의 출처는 때때로 누군가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자기소개서보다도 많은 것을 알려주기도 한다. 평생 용돈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이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 리 없다. 누구든 독립적인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첫 직장 첫 월급’이라는 성인식을 치른다. 내 능력으로 번거야, 이 돈을, 그러니 정말 나는 당당해. 그는 이제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언론은 어른인가. <시사in>의 단독보도로 8월 7일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의 문자메시지가 공개됐다. 그 내용은 적나라했다. 모든 메시지들이 삼성그룹 실세들과 경제, 언론계 인사들이 얼마나 긴밀하게 입과 발을 맞춰왔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다음 날, <한겨레>는 1면에 “언론인들, 무더기로 삼성 장충기 전 차장에 청탁 문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시사in>에서 공개하지 않았던 메시지 중 언론인들의 케이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 중 <문화일보>의 한 간부의 메시지에 눈길이 갔다.
“죄송스런 부탁드릴 게 있어 염치 불구하고 문자 드립니다. (...) 올들어 문화일보에 대한 삼성의 협찬+광고지원액이 작년 대비 1.6억이 빠지는데 8월 협찬액을 작년(7억) 대비 1억 플러스(8억)할 수 있도록 장 사장님께 잘 좀 말씀드려달라는 게 요지입니다. (...) 죄송합니다. 앞으로 좋은 기사, 좋은 지면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이 간부는, 그 이전에 언론인인 그는 왜 전국의 독자가 아닌 삼성에 ‘좋은 기사’로 보답하겠다고 해야 했을까. 또 ‘죄송스런 부탁’이라는 이름의 ‘용돈’을 빌어야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돈을 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의 한 기사에 따르면 90년대 한국 신문들의 수익구조는 구독료 30~40%, 광고 60~70% 였다. 그러나 종이신문 열독률은 1998년 83.8%에서 2014년 30.8%로 내려앉았다. 또한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7년 3월에 발간한 ‘2015 신문산업 매출액 구성 현황’에 따르면 구독료 수입은 13.8%로 90년대에 비해 반 토막도 안 되는 수치로 나타났다. 구독료의 감소, 기업에 대한 광고 의존도의 증가는 ‘부모의 개입’을 암시한다. 여기에 숨겨진 수입인 ‘협찬’과 ‘기획기사 후원’도 합쳐서 셈해야 한다. 언론의 지갑 속 돈의 출처가 ‘소득’에서 ‘용돈’으로, ‘어른’에서 ‘아이’로 변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반면, ‘이미 어른’, 혹은 ‘어른이 되려는 아이’들이 어느 때보다도 예리하게 언론시장의 빈틈을 파고들고 있다. 이미 페이스북과 네이버는 자본력과 기술력을 통해 언론시장에서의 기존 언론사들의 몫을 상당부분 잠식한 상태다. Vox, Quartz, UpWorthy 등 세계적인 뉴스 스타트업들은 공짜가 되어버려 경쟁력을 상실한 기존의 뉴스 포맷을 대체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2014년 3월 유출된 내부 혁신보고서에서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했던 뉴욕타임스는 올해 7월 처음으로 온라인 매출이 인쇄 매출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이들이 집중하고 있는 사업 분야는 다양하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독자 중심의 수익모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보도활동을 통해 소식을 전달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여전히 언론의 몫이다. 그것은 공정한 보도로 신뢰를 쌓아 독자를 위한 독립적인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인사(人事)와 광고를 청탁하고 특정 기업에 유리한 보도를 약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이 무너진다면 언론은 언론인들을 <문화일보>의 그 간부처럼 ‘용돈’을 구걸하는 ‘아이’로 만들 수밖에 없다. 언론에게 사명을 묻는 일을 자기기만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언론은 이제 기업으로서 경쟁력 있는 아이템을 갖추고 정정당당히 사업을 해야 한다. 프리미엄 기사든, ‘넷플릭스’식 정기결제든, 네이티브 기사든, 독자 말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방식으로 말이다.
언론의 ‘사명(使命)’을 지킬 언론의 ‘사명(社名)’은 무엇이어야겠는가. 미래가 될 그 이름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