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Oct 21. 2017

은유 작가,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 강의 동안의 딴짓

강의를 들으러 가서 딴짓을 하다니 나는 나쁜 사람

0) "작가란 마치 은유법처럼 세상의 존재와 존재를 갈라놓으려는 나쁜 언어에 맞서 존재와 존재를 연결시키는 좋은 언어를 짓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중 나와 무관한 일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1) 글쓰기를 왜 해야할까? 중요하니까. 왜?
- 중요하다는 판단은 어쩌면 주어진 것이다.

1-1) 나의 생각과 감정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쓴다.
- 그러나 내가 화나고 기쁠 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할 때 막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좀 더 정확히는 그 이유를 내가 글쓰기를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전제하는 건 위험할 수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솔직하고자 했지만 솔직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용기가 부족했던건지 애초에 솔직할 내용이 없었는지.

1-2) 나의 욕망과 능력을 알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내가 언제 가장 괜찮은 사람인가, 내 욕망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아는 대표적인 사람이 요즘은 이효리인 것 같다."
- 욕망과 현실이 어긋날 때 고통이 시작되는게 아닐까. 내면의 욕망과 나를 둘러싼 현실을 꾸준히 동기화시켜 주지 않으면,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디자인한 '껍데기 자아'는 나의 본래 욕망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껍데기 자아'에 조금씩 달라붙어 누적되고 퇴적된 시간의 흔적들을 근거로 또 한번 '현실'이라는 구조가 구성된다. '껍데기 자아'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현실'에 붙들려 '욕망'과는 무관하게 행동하기 시작하고 그걸 멈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는건 '욕망'이 아니라 결과로서 드러난 '껍데기 자아'니까. 사회라는 규칙 속에서 작동하는 톱니바퀴의 형태를 지닌 부품이 필요한 거니까.

1-3) 나와 연결된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 요즘은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나와 연결된 세계인지. 예전에는 그저 막연히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사회 교과서의 말을 믿고 살았는데, 이제는 점점 자기가 책임질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세계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건 부도덕한 일일 수 있지만, 부도덕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법과 도덕은 명백히 관여하는 삶의 영역에서 차이를 보인다.

딴짓1)
- 원래는 과거의 세계인식을 담고 있는 영화를 본다는 것, 그 행위 자체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전혀 흥이 나지 않았다.
- '각별하게 생각하기'라는 단어가 하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각별하게 생각받지 못한 일들과 각별하게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걸 눈치채 버렸지 뭐야... 각별히 여기는게 과연 뭐지. 자괴감의 산사태 아래 깔려 강의를 듣느라 차라리 수월했다.

2) 생각이 있어야 글을 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만들어진다!
- 정말 생각의 회전이 민첩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글쓰기가 말하기를 예비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며, 생각을 '형성(정교화)'하는 도구"라는 말에 토를 좀 달아보고 싶다. 몇몇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선행하는 문장이 다음 문장을 생산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강력한 클리셰들은 의식적으로 충분히 견제하며 글쓰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딴짓2)
- 내 글의 첫 문장부터 악취가 느껴진건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었던 것 같다. 요즘은 토할 것 같다. 소화가 덜 돼서? 썩은 음식과 안 썩은 음식을 구별할 수 있는 감식안이 없어서? 글에 섞어내는 내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폐적이어서? 냄새를 덮기 위해 본능적으로 치장을 과하게 달아서? 내 자신의 추한 본모습이 너무 적나라하고 투명하게 드러나서?
- "루쉰은 스승을 찾을 시간에 동료를 모아 토론을 하라고 했습니다."

3) 글쓰기는 수영 배우기와 같습니다. (...) 물에 빠지면 구해줄 수영 잘하는 친구를 두는 것은 같이 글 읽고 다듬을 사람을 옆에 두는 것과 같습니다.
- 자폐적인 글을 막기 위해서는 노력 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문장을 낳는 문장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 인간성이 갖고 있는 인식의 지평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책임감을 가져야 나아진다는 말.

딴짓3)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그 분노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영위하고 있던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역겨운 감정이 그 말로 형상화되었다. 그토록 강렬하게 인생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에다 자신을 그리도 오랫동안 내박쳐 둘 수 있단 말인가! (...) 속이 후련했다. 병통을 알았으니 이제는 쉬 정복할 수 있으리라. 이제 그것은 모호하지도 막연하지도 않았다. 이름과 형태가 있으니 그에 맞서 싸우기도 훨씬 수월할 터였다.

- 니코스 카잔차스키, 그리스인 조르바, 14p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아무도 매혹되지 않는 공작 꼬리? 유럽인들이 체취를 감추기 위해 뿌렸던 향수? 가난한 거렁뱅이가 부리는 최후의 허영? 결국 내 자신의 인간성의 한계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없다는 확신을 얻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 싸워야 한다.

4) 화폐가치로 교환되지 않으면 무용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 의미가 있습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글 쓰는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해 두세요.

5) "영 아닌 소재는 없고, 내용만 진실되다면,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없다면." - <미드나잇 인 파리> 대사 중. 진실하지 않을 수록 화려해지고 표현 뒤에 숨게 됩니다. 소재 자체 보다는 주제 장악력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잘 아는 것에 대해서 대체로 주제 장악력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소재는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딴짓4)
- 순진한 것은, 무심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쁜 것일 수 있다. 그걸 고려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나태함으로 읽혀도 무방하겠다. 인식의 한계를 넓히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 내가 당신에게 충격을 주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픽션은 실패한다. 얄팍하고 영리하지 못한 방식이다. 얄팍하고 영리하지 못한 방식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내 자신의 책임이다.

6)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세요. 관념적인 표현은 전부 다 빼버리세요. "나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는 식의 결과만 통보하는 불친절한 설명보다는, "아버지께서는 매일 폭음을 하시고, 방세를 못 준 어미니께서는 안타까워 하시고, 동생은 방학책값,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학교에 안 가겠다고 아침마다 울면서 어머니의 지친 마음을 괴롭힐 때면 나는 또 하루가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웠다"고 알게 하는 전태일의 글이 훨씬 좋습니다.
- 자기 삶에 대한 관찰력과 독자에 대한 배려. 역시나 글은 필자의 인간성을 담는구나.

7) 픽션의 구조를 가져와서 논픽션을 씁시다. 소설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입니다. 구체적인 문장을 통해 글 쓰는 사람의 위치성이 드러나는 것이 보여야 좋은 글입니다. 모호한말 대잔치를 피하세요. 구체적인 사건이 있어야 하고, 어떤 장소와 시간, 상황에서 시작하세요. 예를 들어 어떤 선생님이 과거 학생이었던 자신과 현재 선생이 된 자신을 비교하며 체벌에 대해 쓴다고 해봅시다. "나는 체벌이 나쁜 줄 몰랐고..."는 재미 없습니다. 먼저 장소, 시간, 상황을 던져 독자를 글 안으로 끌고 들어오세요. 필자의 리듬에 독자를 동기화 시킨 다음에 설명을 하는 겁니다. "~~한 사건이 있었다. 나는 체벌이 나쁜 줄 몰랐다."

딴짓5)
- 나는 자기객관화에 실패했다. 신호는 도처에 널려있었고, 모순은 이미 감지되었다. 무너진다. 무너지나? 무너진다고 쓰는 것으로 무너지는데 실패해버릴 것만 같다.

8) 조지 오웰은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수잔 손택은 "문학은 용기다"라고 말했죠.
-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하는 일이다." 이성복 시인의 말을 오만하게 읽으면 안된다. 내가 오만하다고 고백하면서 오만해지지 말아야 한다. 같은 의미로 "벌거벗은 자신을 써라. 추방된 상태인, 피투성이인."이라는 데니스 존슨의 문장에 대해서도 실례를 저지르면 안된다. 자기 자신이 피투성이가 아닌데 피투성이로 만들지 말고, 추방된적 없는데 추방시키지 말고, 벌거벗은적 없는데 벌거벗기면 안된다. 자기연민에 취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전제는 '자기객관화'다.
- 나는 '자기객관화'에 실패했고,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나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각별하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나 보다. 이제는 왜 내 목소리가 커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기만'과 싸우며 다시 한 번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9) 이성복, "신기한 것들에 한눈 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져라." 경험의 돌려막기는 머지 않아 부도가 납니다. 당연한 것을 질문할 때 글감은 솟아납니다.
- 하지만 "왜?"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왜?"가 뚫어낸 공란을 채워 질문과 답변을 한 쌍으로 완성시켜가는 과정이 질문의 진자 곤란함이자 요체가 아닐까. 그렇게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발견하고, 논리정연하게 쌓아올려 발판을 마련할 때 나는 비로소 안전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10) 이태준,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메시지가 가려집니다. 주례사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11) 부사를 없애고 근거와 사례에 충실하세요.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있다"는 스티븐 킹의 말은 과장이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심각하게 아팠다"와 "그녀는 갑상선 암을 앓고 숨이 안쉬어져 응급실에 실려갔으며, 자궁근종 수술을 한다"는 다릅니다. 근거와 사례가 탄탄하면 부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딴짓6)
- 내가 보는 내 모습과 남이 보는 내 모습 사이에 벌어진 낙차를 동기화 하려면 충격은 불가피하다.
- 나는 왜 글을 썼던 걸까. 모든 외피를 전부 다 벗겨내니 내 자신의 외로움만이 남아 있었다. 외롭지 않기 위해 쓴 글이 거꾸로 나를 고립시켰음을 깨닫자, 자책감에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이런 궁상맞은 단어의 조합들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은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걸 알았는데. 하지만... 도저히 뭐라 표현하기도 싫은 이런 글쓰기가 유일한 내 말하기 방식인데.

12) 김현, "남들이 쓰지 않는 글,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쓴다." 안전한 글을 피하세요. 거대한 단어에 기대지 말고, 도식화 하지말고, 자기 느낌에 충실한 해석을 하세요.

딴짓7)
- 세상에 너무 힘들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살을, 살을 빼야해.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는 가능한가, 가능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