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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미래는 가능한가, 가능한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1. 힙플 게시판 옛날 기록들 찾아보면 가끔 재미있는 자료들이 나온다. 에픽하이 4집 발매 당시 엇갈리는 리스너들의 평가들 속에 한 사람이 타블로의 일기를 댓글로 달아놨다. 음악의 중력에서 나사를 몇 개 풀었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멜로디, 가사, 그리고 사운드... 이 세가지를 분리해서 따로따로 생각한다면 소리의 기본 원칙만 따르면 된다. 가장 깔끔한게 가장 좋은것. 허나 작곡-작사-녹음 과정이 다 끝난 후에도 우린 몇달동안 고민했다... 퇴폐적인 멜로디와 가사를 깨끗한 사운드로 표현하는게 과연 정답일까? 다양한 뮤지션들과 믹싱 전문가들과의 상의 끝에, 원칙에 어긋나는 선택을 했다. 음악의 'low end (bass, sub, 등등)'를 단단하게 잡으면 전채적인 사운드는 깔끔해지고 '예뻐'지겠지만, 이 앨범이 요구하는 색채는 약화될거라고 판단했고, 음악의 '중력'에서 나사를 몇개 풀었다.


2. 책 서너권을 동시에 읽고 있다. 자의에 의해서 한 권, 타의에 의해서 두 권, 읽다 말다 한 권. 진도 나가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모가지를 짤라버리고 싶을 정도로 빈번하게 핸드폰에 손을 대고 만다. 독서모임 때문에 읽고 있는 '타인의 고통'은 본문은 다 읽어서 부록만 더 읽으면 되는데 문제는 사피엔스다. 이제 230페이지 쯤 읽어나가고 있는데 아직 370페이지 남았다. 그래도 농업혁명 이후로 재미가 붙어서 열심히 읽으면 진도는 어찌어찌 뺄 수 있을 것 같다. 난 이런 시각의 책이 재밌더라. 분명 서양미술사나 총균쇠도 잘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책은 엉덩이로 읽는거라 겁부터 난다. 아, 그러고보니 진짜 문제는 수요일 자정까지 독후감까지 써야한다는 사실이다.

3. 그리고 몇 달 전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구매한 금정연, 정지돈의 '문학의 기쁨'이 문젠데 이게 왜 베스트셀러 섹션에 있었는지 의문이다. 평론계의 아이돌인가? 책장에 묵혀놨다가 꺼내서 조금씩 틈틈히 보고 있다. 익숙한 포맷은 아니지만 그래도 읽다보니 도움이 될만한 구석이 있는 책인 것 같다.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문학은 가능한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가능한가? 아직 변기의 물을 열심히 내리는 그들의 대화를 통과하는 중이다.

전통적인 소설이 2013년 현재에 더이상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수의에 수의를 한 겹 더 두른 것 뿐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대개의 소설이 취하는 더딘 발걸음은 우리 삶의 속도에도, 삶에 대한 의식의 속도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대개의 소설이 인간 행동을 탐구하는 방식은 여태까지도 인지과학과 DNA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 훨씬 더 의존한다. (...) 대개의 소설이 결정적 순간을 그리는 방식은, 마치 히치콕 영화에서 그대로 딴 것처럼, 영화로 찍으면 될 것 같은 일련의 장면이다. 대개의 소설이 보여주는 단정한 일관성은 - 호평받는 작품들이 유달리 그렇다 - 세상을 지휘하는 신성이 존재한다는 믿음 (...) 을 암시하는데, (...) 그럼으로써 우리를 감싸고 침투하고 압도하는 혼돈과 엔트로피를 깜박 잊게 만든다.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문학은 내 삶을 구할 수 있는가. 또는 새로운 문학은 내 삶을 더 잘 구할 것인가. 또는 문학이 삶을 구하는 도구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또는 도대체 문학이 삶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4. 믿음의 메커니즘은 인간을 설명하는 모델 중 가장 설명력이 높은 편이라고, 믿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의 계기는 세월호 침몰 원인을 놓고 자로와 그 지지자들, 또 그들을 비난하던 이들의 행태였다. 분업의 시대,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당연히 전문가들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전문가를 믿지 못했는가? 나는 이 현상을 그냥 "깨시민 쯧쯧" 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믿음과 망각(역방향의 믿음)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니까. 신기하게도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와중에 '사피엔스'를 읽게 된건 타이밍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신이든, 물신이든, 자신이든 어쨌든 뭔가를 믿을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분업의 시대에는 잘 교육받은 개인도 한 분야에서나 가까스로 전문가일 뿐이다. 그나마도 냉정하게 보자면 대부분이 다른 이들의 발견에 기생하는 얼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검증할 수 없지만 필요한 정보는 '믿는다', 아니 그보다는 '믿을 수 밖에 없다'는 쪽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믿음은 편향에 기대기 마련이지만 그 나름의 경제성이 너무도 절대적이다. 사람들이 SNS를 사용하면서 필터버블에 빠지는 이유는 별거 없다. 죄다 확인해가면서 살기에는 피곤한걸 넘어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사실을 확인해야할 만한, 내 믿음과 대치되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다. 근데 여기까지 적고 있는데 매우 귀찮아졌다. 그만 쓰고 싶다. 어쨌든 전문가들이 변기물을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는 점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단순히 냉소주의를 퍼뜨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 포인트다. 인류의 역사는 결코 합리의 누적이 아니다.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신화로 패러다임을 이동해온 기록일 뿐이다. 적어도 농업혁명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5. 환원, 악마화, 극적인 것, 좁은 지면, 한정된 주의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저널리즘이 처한 위기의 본질이자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와도 맞닿아 있다. 하버마스가 "계몽은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하기도 했(다고들 하)지만 그 계몽이라는 것의 실체가 이 모든 객관적 사실들을 품어 안고 있지 못하다면 좀 더 세련된 교조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소홀한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는 윤리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타인의 고통은 나에게서 가능한가? 가능하다는 질문은 가능한가? 아직은 모르겠다. 좀 더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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