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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7. 2017

2017년이 '광주'라는 상처를 보듬는 방법

택시운전사 (A Taxi Driver, 2017)

여전히 숨 쉬는, 혹은 이미 숨이 멎은 상처들을 위한 진혼곡.
두 외부인을 통해 들여다본 두 번째 광주.

5.18 광주는 끊임 없이 변주 되어야 할 민족적 상흔이다. 상처가 아물 때 까지 충분히 반복하고 반복하되,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더 나아져야 한다. <택시운전사>는 이 임무를 무사히 수행해냈다. 10년 전에 동일한 소재를 다뤘던 <화려한 휴가>보다 만듦새가 더 나아보였다. 강박적 신파는 줄이고, 상황의 전달에 집중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 더더욱 만듦새에 민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참상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볼 영화고, 또한 이런 영화의 흥행이 현실세계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흔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파급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택시운전사>의 가치는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광주에 대해서 외부인의 위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고, 일가친척의 연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광주의 참상을 외부에 알릴 목적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김만섭(송강호)은 관객,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 역)는 제작진의 위치에 대입해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외부인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자'와 '광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로 나뉘고, 후자의 경우 광주의 실상을 외부에 폭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과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동일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면서도 층위는 다른, 각자의 광주로 진입하게 되며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같은 공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본작은 기본적으로 양 극단의 선악대결을 조명한다. 광주 시민들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물리적 수단, 참혹한 현실을 알릴 언어적 수단을 모두 박탈 당한다. 조준사격 앞에서만 약자가 아니다. 스스로를 언어화 할 수 없다면 누구든 약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검열 당해 텅 빈 신문의 1면이 그들의 무력감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살갗을 부대끼며 도시 단위의 거대한 연대를 만들어낸다. 임시적이고 헐겁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저항적인 힘이다. 신군부는 무력을 동원해 그들의 입을 말 그대로 틀어 막는다. 그러나 물을 손에 거머쥐는 것처럼, 그 통제는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완벽하게 작동하는데는 실패하고 만다.

한편 금남로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사격씬에서 힌츠페터의 카메라와 공수부대의 총부리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장면은 카메라의 폭력성에 대한 고전적인 비유를 담고 있는 한편, 정확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때(영화에서 정확히는 동영상을 찍었지만) 사용하는 동사는 'shot'이다. 기자가 카메라 렌즈를 겨누고 피사체를 쏘면, 그 피사체는 촬영 순간에 정지된 채 필름에 박제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비유다. 그래서 종종 사진을 찍는 행위는 폭력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총알은 어디를 향했는가. 광주 시민들을 'shot'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공수부대, 신군부를 타격했다. 이를테면 금남로 씬은 사실 공수부대와 힌츠페터의 숨막히는 총격전이었던 셈이다. 또한 자칫 무력하게만 그려질 수 있었던 광주 시민들은 힌츠페터의 피사체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진실된 용기를 주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다.

힌츠페터가 국가권력과의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일반의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다른 한 명의 외부자 김만섭은 내면의 상처와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인다. 영화 초반부 부터 중반부 까지 김만섭은 일관되게 대학생들의 데모에 대해 대학생들이 배가 불러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비싼 등록금 내고 허구헌날 데모나 하러 다닌다고 투덜댄다. 기회가 될 때 마다 과거 사우디 파견 에피소드를 떠벌리며 국가와 가족 경제에 일조한 자신의 과거를 전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 사우디 파견은 좋은 추억이 아니었다. 사우디에서 벌어온 돈을 탕진하고도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하나 남은 딸을 엄마 없는 외로움에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가장의 초라한 뒷모습이 그에게 숨겨진 그림자였다. 그의 말대로 국가는 번영했지만, 삶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의지할 사람이 아빠 뿐인 딸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딸에게 더 나은 나라를 물려줄 수 있는 선택지가 동시에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결말부에 치명적인 무리수(누구나 지적하는 자동차 추격씬)가 있었지만 그 이전 씬들에서 보여준 침착한 전개를 생각하면 이 영화를 <화려한 휴가>의 신파성과 비길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서울 택시양반 김만섭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80년대 광주를 드라이브 해보자. 가슴팍에 묘한 응어리가 얹혀야 마땅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불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과실과, 87년 체제 민주주의에 대한 부채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후불제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이제는 은폐되고 곰팡이 핀 상처에 빛을 쪼이고, 과거의 유산에 제 값을 지불할 준비가 됐다. 그러니 언론은 진실보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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