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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문학의 기쁨>, 잡담2, <쇼미더머니>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왜 한국에는 유독 공모전 형식의 문학상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정지돈씨가 말했다. (...) 성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출간된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이다. 그런 상이라면 한국에는 동인문학상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기뻐하고 어떤 작가들은 거부하는 상. (...)
우리는 그것이 일종의 상업주의라고 생각했다. (...) 과격하게 말하면 상금의 액수는 수상작에 독자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권위라고 해야 하나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걸 더해주는 마케팅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문제는 상금이라는 가짜 권위가 만드는 양극화다. 독자들이 예전(그게 도대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만큼 한국소설을 읽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독자들의 한정된 관심은 우선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작품들로 쏠리기 마련이다. 인터넷 서점의 한국소설 카테고리에 들어가보면
안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쏟아지는지. 얼마나 많이 읽히지 않는지 (...)
어쩌면 신인상이라는 한국식 제도가 공모전 과잉 현상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에 학연 지연 뭐 그런 문제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차악을 선택한 게 지금의 등단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방식에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한 번에 수백 편의 작품을 심사한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다른 매력이 있는 작품에 순위가 매겨진다는 말입니다. 이 친구는 실험적이고 개성도 있지만 그래도 수상작이라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야지, 하는 식의 고려 역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나는 말했다. 너무 속단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저는 속단하지 않습니다. 정지돈씨가 말했다.
만약 실험적이고 문제적인 작품이 상을 받으면 그때는 뭐라고 할 거냐고 내가 묻자 정지돈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다.

-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47~49p


삶이 있고, 예술이 있다. 존재의 순서에 대한 얘기를 하려던건 아니었는데, 써놓고 보니 문장의 뜻이 그렇게 읽힌다. 굳이 닭과 달걀의 선후관계를 따져보자면 아무래도 삶이 먼저 있었겠지. 그러나 일단 존재하게 된 다음에는 삶이 예술을 낳기도 하고, 예술이 삶을 낳기도 하므로 굳이 구분이 필요한가 하는 입장이다.

음. 그런데 만약 예술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삶이라는 것은 인간 경험의 총체를 뜻한다고 해보자. 삶은 예술, 경제, 사회, 정치, 생명 활동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가정.

다시, 그런데 만약 예술이라는 것이, 총체로서의 삶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있어서 자본주의로서의 삶과 동치 수준이 된 그 속에서 함께 질식해가고 있다는 인식은 어떨까? 그러니까 가령 예술이 완전한 잉여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자본주의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진공속에서만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술의 논리와 경제의 논리가 별도로 독립적이고 섞일 수 없는 것이라면? '상업 예술'이라는 단어는 그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면?

그러나 '상업 예술'은 명백히 어떠한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 가치가 예술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잠깐 건너 뛰어보자.

<쇼미더머니>는 이미 불가역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쇼미더머니>를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다. 아, 물론 쇼미더머니를 없애자는 사람들이 대개는 그런 소리를 진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뭐, 세상에 대한 막연한 푸념 그런거 아닐까? 무엇보다도 러다이트나 왕정복고운동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고.

물론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갈래의 주장들의 타래가 딸려올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듯이, 고결했거나 이상적이었다는 듯이 선뜻 말 덩어리를 툭툭 던져놓는 주장은 조금 가슴 아프다. 그 가슴 아픔은 대강 '예술은 경제나 정치와는 다르단 말이다!' 하고 그들이 깔아놓은 전제 때문이기도 하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아는 바가 없다. 별로 얘기 나눠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음. 여튼 <쇼미더머니>가 불가역적인 이유는 그 현상이 홀로,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현상을 둘러싸고 있는 어떠한 사회적인 기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에게도 호응받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한 해에 얼마나 많은 기획들이 시도되었다가 관심도 받지 못하고 폐기되는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이해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쇼미더머니>는 어떤 잠재된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던 사회적 필요 혹은 욕구가 형태로서 구현된 결과다. 그래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쓱싹 잘라내 폐지하더라도, 그 현상을 가능하게 했던 기저의 어떤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면 <쇼미더머니>를 없애는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쩌저찌 <쇼미더머니>라는 '암세포'를 말끔히 도려내더라도 이미 현재는 해당 현상과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변형되어 과거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다.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게 <쇼미더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프로그램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던 과거의 인식과, 있었다가 없어지고 난 이후의 인식은 같을 수 없다. '씨스타19'도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개소리는 넘어가자.

즉, 사회가 변하든가,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경우의 수도 선택할 수 없다. 사회는 변화시키는게 아니라 변화 하는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사람들의 기억에 접근하는 기술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쇼미6>는 과거 시즌들에 비해 그렇게 까지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스쳐가듯 봤던 기사의 헤드라인에 따르면 한 시즌 쉰다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에도 대중의 피로도와 프로그램 포맷의 역량을 고려해 한 시즌 쉬는 것은 영리한 판단이다. 한 시즌의 공백동안 힙합씬이 어떻게 되는가 지켜보면 좋겠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쇼미7>을 기다리지 않을까, 그러니까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다고 느끼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다.

대안을 요구하는 건 쉽지만, 그것의 형태를 상상하는 건 어렵고, 실현까지 시키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말이다.


최근 국면까지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대부분의 기사나 특종이 기성 미디어를 통해서 생산됐습니다. 포털 첫화면에 게시되지 않은 훌륭한 기사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상상한 대부분의 소재들은 거의 다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한국기자상 리스트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기성 미디어엔 저널리즘 의식과 이를 실현할 발군의 실력을 갖춘 기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과 스타트업이 기사 작성 실력으로 맞붙는다면? 글쎄요, 저는 기성 미디어의 실력 있는 기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넓은 네트워크, 오랜 경험, 팩트 여부를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촉수 등은 한두 해의 경험으로 쌓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굳이 이들과 직접 경쟁하는 선택이 현명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쇼미더머니>는 명백히 어떤 가치를 산출하고 있다. 그것이 예술적인가 하는 질문이 남아 있다. 그런 것 같기도,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건 나중에 대답하고 싶다.

근데 그래도 독후감인데 이렇게 글을 막 우당탕탕 써도 되나...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자판을 두들기고, 발행 버튼을 누른다. 짠! 똥글이 나온다. 똥은 마땅히 변기 레버를 잡아당겨 떠내려 보내는 것이 옳다. 똥은 똥일 뿐이다. 똥은 변기 속으로 사라지라고 싸는 것이다.
어째서 인지 어딘가 괜히 속이 상해서 마구잡이로 쓰는 것 같지만, 뭐 어때. 어차피 처음부터 이런건 아무 의미도 없다. 아, 맞아. 나 어딘가 속이 상해있다. 어딘가 상해있다. 속상하다.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자판을 두드리고, 발행 버튼을 누르고, 똥을 들여다보고, 수정 버튼을 누르고, 자판을 두들기고, 발행 버튼을 눌러서 다듬어진 똥이 나온다. 같은 똥인데, 뉘앙스도 내용도 달라져 있다. 또 다시 못참고 글이 거칠어졌다. 사실 의도대로 되었다. '혼자서 뭔가를 참고 있는데 결국 못 참고 글이 거칠어지는'게 애초에 의도였다.

덧붙여, (아까는 '게다가' 였다.)

살아가노라면 우린 갖가지 덫에 걸려 찢긴다. (...) 덫을 덫으로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 (...) 작가들은 지난날 자기 독자들의 마음에 들었던 걸 또 쓰는 경향이 있다. 그랬단 끝장이다. 대다수 작가들은 창작 수명이 짧다. 그들은 찬사를 들으면 그걸 믿어버린다. 글쓰기의 최종 심판관은 딱 한 명, 작가 자신밖에 없다. 작가는 평론가, 편집자, 출판업자, 독자에게 휘둘리는 날엔 끝장이다. 그리고 작가가 명성과 행운에 휘둘리는 날엔 강물에 처넣어 똥덩어리와 함께 떠내려 보내도 물론 괜찮다.

-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49~50p

물론 내가 감히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덫을 알아본다. 다행이다.
근데 왜 쓰면 쓸 수록 우울해지는 걸까. (이 문장은 나중에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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