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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이 책의 추천사 서두에 인용된 빅터 프랭클의 질문이다.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는 자기 고백의 위험을 겁내서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삶의 의지를 쉬이 잃는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으려니 하는 평가 때문이라고 하는 이유가 좀 더 가까웠나 생각해본다. 이런 사람에게 일을 맡긴다면 끝까지 제대로 해낼 수 있으리라 믿기 힘들다. 부정적인 평판만으로도 노동 시장에서 탈락할 수 있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로부터 쓸모없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통 이런 이야기들은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죽고 싶었다. 이것만은 피할 수 없이 진실이고,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죽고 싶다는 마음이라는 게 뭐 대단히 모욕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계기씩이나 되어 불같이 일어나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마음 속에 굉장한 결핍이나 결함이 있어서 그랬다고도 생각치 않는다. 다만 그 실체를 되돌아보자면 독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내 존재의 무쓸모함과 무의미함이었던 것 같다.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들이 모두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귀중한 현재를, 단지 우울한 현실을 회피하고 지난 날을 추억하는 데만 소모하여 현재가 다시 후회로 가득 차도록 방치해버렸다.

악순환이 유도하는 추락에의 유혹에 저항할 수 없게 된 순간, 딱히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의 경계가 대단치 않은 것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죽을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아갈 이유도 없는 그 경계선상에서 무장해제 당한 채 서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저 "내가 어째서 살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자문하는 것만이 유의미했다. 만에 하나 내가 정말로 목숨을 끊었다면 그 죽음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코앞에 놓인 미지의 영역으로 한 발짝 들여놓는 것에 불과했으리라.

나같은 사람들에게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작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지면을 빌어 소리쳤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는 오늘날의 정신분석학이 근대 이후의 모든 사상들의 기반인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위에 뿌리 내려 인간성을 상실했으며, 정작 궁극적인 치료보다는 눈앞의 증상 완화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환자는 되려 치료 과정에서 정신분석의 여러가지 논리를 접하면서 삶의 흔적을 긍정하기 보다는 부정할 방법론만을 학습하기도 한다. 치료에의 의지가 오히려 삶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시키는 격리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셈이다.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가르침, 즉 인간은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거나 유전과 환경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환자로 하여금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 즉 자기가 외적인 영향과 내적인 환경의 담보물이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이런 신경증적 숙명론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심리치료법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

그렇다고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빅터 프랭클이 제시한 로고테라피 학파는 이와 다르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었던 참혹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학문을 정립했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을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적 요소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의 실존적 현실, 즉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뿐만 아니라 앞으로 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들의 생과 사를 갈랐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의미와 목적을 잃었느냐, 잃지 않았느냐에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의지를 잃은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빠르게 붕괴하는지 수없이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다시 말해 지금의 정신적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성적 에너지나 유년 시절 부모로부터와의 관계를 끌고 들어오기보다 현재 삶의 무의미를 극복할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삶의 무의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의미다! 간단한 이야기다. 정신분석이 현대인의 실존적 문제를 직시하는데 실패했거나 혹은 외면하는 것은, 정신분석 그 자체가 이미 허무주의 위에서 실존의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빅터 프랭클은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실존적 좌절로 인한 고통은 신경질환 증세라기 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를 이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이 말처럼 비극 속에서 낙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 의미를 찾게 되면 삶에 대한 태도는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로고테라피는 그 뭔가를 찾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운명론적인 자세에 매여있기는 하지만, 환경에 매인 인간에서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의 문제의식 전환과,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조언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 책이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제리 롱은 3년 전에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목 아래 부분이 마비되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는 17살이었다." (...)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롱은 자기 목을 부러뜨리도록 선택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이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P.S) "수많은 수감자들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 "저 사람들은 정말로 나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일까?""
"슬프다! 마침내 자유가 실현되었을 때, 모든 것이 자기가 꿈꾸어오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여! 어쩌면 그는 전차를 탁, 몇 년 동안 마음 속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 속에서 수천 번 되풀이했던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꿈 속에서 수천 번 되풀이했던 것처럼 벨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어 주어야 할 그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 군대 생각나서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P.S 2)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련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불가피한 상황을 전제로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P.S 3)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P.S 4) 예기불안 - 역설의도, 과잉욕구, 과잉투사 - 역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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