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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하나의 세상, 갈등의 증폭, 그러면?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오늘날 서양 중심의 헤게모니와 종교 근본주의가 충돌하며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집필된 조너선 색스의 <차이와 존중>에서는 세계화 시대에 종교가 인류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다양한 방법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아무래도 '타자와의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이 아닐까 싶다.

상호간에 타자인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발화자와 수용자 사이에 의미있는 정보교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공통의 대화주제가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발화를 올바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배경지식과, 상대의 주장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관용 정도가 필요할 것이다.

세계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공통주제를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같은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각도로 바라볼 때 일어난다.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대화가 'Yes'일 때 속도가 극대화되며, 'No'는 대화의 흐름을 중단시킨다고 말했다. 초기에 페이스북이 '싫어요'는 없이 '좋아요'만 제공했던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의 목적과 중요성은 어떤 의견에 대해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한 빨리 도달하도록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단지 세상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했을뿐, 이것이 아이디어의 가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대화의 양적인 증가가 그러니까 오히려 거꾸로, 최초에 제안된 아이디어가 수많은 반대를 만나 진화해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종이 번성하기 위해서 다른 유전자적 특성을 가진 개체들과의 생식을 통해 변화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기 집단에게만 말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유대인은 유대인에게, 기독교도는 기독교도에게, 이슬람교도는 이슬람교도에게만 말을 건네고, 경제 지도자와 경제학자, 세계화 반대론자들 역시 그들의 동료들에게만 이야기한다. 커뮤니케이션 경로(이메일, 인터넷, 온라인 잡지, 수많은 유선 및 위성 TV 채널 등)가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로우캐스팅(Narrowcasting)할 뿐이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론의 장을 공유하고 그러하기에 상대방을 직접 만나서 논쟁하고 설득해야 했던 시절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만을 상대하고 다른 목소리는 걸러낸다.
-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16p


그러나 앞서 한병철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적했듯이, 'Yes'에 비해서 'No'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No'는 대화의 유통을 중단시킨다. 대화의 구성원들은 대화가 중단된 그 시점에서 충돌한 가치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 전까지는 정보의 유통을 재개할 수 없다. 이 때, 가장 쉬운 선택지는 "절충을 포기하고 다른 의견이 발생한 집단을 제외한 채로 대화를 재개한다"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내로우캐스팅'하게 된다.

'내로우캐스팅'은 갈등요소를 해결하기보다는 배제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SNS상에서 '팔로우' 기능을 통해 대화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소식만을 받아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해 팔로우를 취소하면 더 이상 그 사람의 글은 나의 뉴스피드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논의를 확장시키는 데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대립되는 의견의 고립을 심화시키고 논쟁을 둘러싼 몇몇 키워드에 다른 맥락을 부여한다.

이렇게 서로의 체계 내에서 다른 맥락 속에서 숙성된 같은 단어들은 더 이상 통약 불가능해진다. '세월호'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세월호 유족들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은 '세월호'라는 단어로부터 '떼법', '세금', '시위', '감성팔이' 등의 단어가 연상되며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 체계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찬성 입장의 사람들은 '정부 책임', '보상', '유족 위로', '추모' 등의 단어가 떠오르며 나름의 논리 체계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같은 기표를 사용하지만 다른 기의를 말하게 된다.

사실 서로의 논리 체계가 다르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바뀌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해당 문제가 공적이거나 도덕적인 경우, 즉 사회적으로 시사적인 것에 관해서는 개인의 취향 선택 문제로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대의제의 일원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있다면 비록 품은 많이 들지만 회피하지 않고 'No'로부터 균형점까지의 여로를 함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대화로부터 타협을 이끌어내는 일이다. 아무리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인과 이슬람인이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 다른 교리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이 두 집단은 각각의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일반적으로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종교 이전의 더 큰 공통분모에 기대곤 한다. "우리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같은 인류입니다." 그러나 둘을 묶는 카테고리의 범주가 커질 수록 서로를 묶는 도덕적 친밀성은 약화되고 '인류'라는 단어의 속은 비어버린다. 우리는 지금까지 각자의 진리가 충돌할 때 이런 식의 중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워왔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지름길은 없다.
-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105~107p


조너선 색스는 여기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갈등이 발생하면 가장 눈에 밟히는 차이점부터 제거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차이를 제거하려는 데서 발생한다. 보편에 기대어 차이를 제거할 수 없다면, 반대로 차이에서 출발해 그것을 포함하는 보편을 향하자는 것이다. 화해가 일시적인 갈등의 봉합이나 은폐 수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차이로 인해 인간이 개별자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인류의 문화가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차이를 거세했을 때 우리가 잃게될 것이 얼마나 많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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