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피로한 주제에 대한 피로를 덜고 싶었다(이얍! 한남충이 열일한다!). 페미니즘을 현실변혁의 도구로 사용한 책들을 먼저 읽기 보다는 지금까지 어떤 논의가 이뤄져 왔는지 훑어보는 것이 순서라고 느껴져 대강 페이지를 넘겨보고는 골랐다. 악랄해 보이는 제목에 비해 순둥순둥한 문장으로 구성된 반전이 매력 포인트다.
보부아르 이후 개별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사조를 다루고 있으며, 총 8개의 챕터를 각각의 필자들이 나누어 담당하고 있다(시몬 드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레, 샌드라 하딩, 캐롤 길리건, 엘렌 식수, 아이리스 매리언 영, 주디스 버틀러, 깁슨-그레이엄까지). 사실 아직 다 읽은건 아닌데 버틀러 파트 절반 정도 읽고 있고, 애초에 구성이 약하게 연결된 옴니버스식이라 괜찮을거라 믿는다.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다학제적 연구다. 뭔소리냐면 기존 연구분야와의 콜라보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뜻이다. 즉 몇몇 학문 분야에 대한 개념이나 이름들을 몇 개 줏어들은게 있으면 편하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존 롤스의 정의론, 토마스 쿤의 과학철학,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등등등. 근데 그런거 생판 몰라도 필요한 개념은 다 짚어준다. 다만 책 읽으면서 그걸 다 감을 잡아야 되니까 더 힘들긴 하겠지만. 나 역시도 저 친구들 잘 모르지만 친절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이 다소 상식과 배치되다 보니 어려운 느낌은 있다. 근데 이건 개인적인 생각.).
애초에 이 책은 현대 페미니즘 전반에 대한 개론서 포지션이다. 그러다 보니 다소 교과서 같은 느낌도 든다. 문체는 간결하며, 챕터마다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생애 - 문제 의식 - 주요 개념 - 연구의 의미와 한계'로 반복되어 글의 구조 파악도 쉽다. 하지만 챕터마다 필자가 다르다보니 글 수준에 다소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리스 영을 설명한 모모모씨의 글은 중언부언도 많고 다른 챕터에 비해 논쟁적인 부분에 대해서 매우 짧게 짚어주어 아쉬움이 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여겨본 것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기존 학문에 대해 어떤 발상과 논리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는가 였다. 설령 그 연구자의 이론이 매력적인 결론으로 귀결되지 못하더라도, 기존 학문체계의 지배적인 시각을 근본적으로 까면서 출발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물론 그렇지 않은 이론이 어디있겠냐만). 문제제기와 시각의 전환으로 사람들에게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 어쩌면 페미니즘의 가치는 1차적으로 '충격' 그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가지고 한국의 현실에 가타부타 하기에는 소개된 이론 이상으로 꼬여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직접적으로 여성혐오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면 이 책은 아니다. 아무래도 '여성'의 문제가 우선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현대로 넘어올수록 '여성적'에서 '여성주의적'으로(정확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느낌), 다시 말하면 '본질적 성'보다는 '타자', '차이' 등의 개념과 더욱 강하게 결부된다. 또한 '여성'의 본질, 더 나아가 '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드는 학문적 사조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 논점들의 베이스가 된 사유들과 그 흐름을 잡기에는 알맞고, 꽤 이지하면서도 내용면에서도 균형을 잘 맞춘 책이었다.
P.S) 다음 책으로는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를 읽어볼 생각이다. 근데 이거 좀 두꺼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