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Oct 21. 2017

'말이 안 통하는 것'들과 소통하는 법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저번에 읽었던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의 마지막 파트인 깁슨-그레이엄의 여성주의 정치경제학 파트를 맡았던 이현재 씨가 쓴 책이다. 그 파트의 내용이 내게 유독 와닿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글을 참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가 오랫동안 머릿속에 이고 다녔던 고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 저자를 믿고 고민없이 결제했다.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샀다. 분량은 적었지만 공감하는 바가 많아 울림은 컸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저자인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개념과 함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제안한다.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개념끼리는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불교와 기독교의 내세관이 다르기 때문에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통약 불가능하다.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뉴턴이 제안하는 질량은 물체의 무게를 나타내는 개념이기 때문에 절단되지 않는 한 불변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게 질량이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렇듯 서로 다른 체계에 속하는 언어는 온전히 뜻이 통하지 않는다.

통약불가능성을 조금 더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자. 현재 대선정국에서 발생하는 이슈들을 놓고 20대와 60대의 언어가 통약가능할까? 두 집단이 갖고 있는 사고 체계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예 소통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꽤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리라 예상가능하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이슈를 놓고 만나는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여자'라는 집단은 과연 단일할까? 더 나아가서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는? 서로 간의 차이를 품고 있는 이 집단들은 서로 통약가능할까? 단일하지 않다면 이들 집단 사이에 연대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왜 지금 시점에 이러한 차이를 인식해야 하는걸까. 여성철학 연구자로서 논쟁을 추적해 온 저자 이현재의 조심스러운 자기고백에 귀 기울여보자.

나는 지금 여성혐오를 둘러싼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이 책을 쓰고 있다. (...) 여성혐오를 그대로 되받아 남성혐오로 돌려주는 메갈의 미러링은, 그간 여성주의 진영에서 보여준 그 어떤 움직임보다 유례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메갈의 미러링이나 패러디 방식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대두했다. (...) 사건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과정에서 감지된 것은, 보수성향의 일베뿐 아니라 소위 진보성향의 남성들조차 메갈의 전략 앞에서 망설이거나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여성혐오를 발화하는 일베가 아니라 여성혐오에 맞서 대응하는 메갈에 맞추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백하건대 심경이 복잡해진 것은 남성들만이 아니었다. 일부 여성들, 아니 오랫동안 여성철학을 연구해온 내 마음도 복잡해졌다. 메갈리안이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메갈리안이듯, 여성도 여성들이며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들이기 때문이다. (...)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페미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은 또 다른 강력한 이분법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은 강력한 규제주의나 성 엄숙주의로 치닫는 것 같았다. 비판을 추동하는 분노의 감정에는 정치경제적 측면에 대한 고려나 집단 내부의 차이를 배려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면서 여성주의 운동 내부에 존재하는 일련의 흐름과 전체주의적 경향성에 대해 걱정한다.

그의 문제의식에 따르면 이제 여성주의 운동은 양적인 증폭에서 질적인 변화에 대한 필요를 인식할 때가 됐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남자 페미니스트의 문제 뿐만 아니라 "세대에 따라, 자신이 가진 신념과 문화에 따라 그녀들은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이기 때문이다. 잠재된 차이가 균열로 증폭되기 전에 새로운 언어로 정리되지 않으면 연대는 지속될 수 없다.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주의 몸부림이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말'이 '글'로 재정립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성혐오에 대한 혐오로는 지금의 구조를 전복시킬 수 없다. 여성혐오의 구조가 강력하다는 사실만을 역설하는 것은 우리가 이 구조로부터 빠져나올 구멍이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다. 체계 바깥을 생각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이 밖으로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대중매체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을 비판하면서 처했던 곤경과도 비슷하다. 대중매체의 정신조작이 그렇게나 강력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영향력으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따라서 억압구조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존재가 바로 메리 더글러스 등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했던 '비체(abject)'다. 비체는 'object(대상)'에 접두어 'a-(아니다)'를 붙인 단어다. 이들은 기존체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비체가 여성주의의 역사를 쓰고 있었음을 인지하고, 거기서 혐오의 구조에 구멍을 내는 여성들의 행위자성을 발견한다. 가부장주의는, 심지어 여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뤼스 이리가레가 '남성 동성애구조'라고 까지 비난했던 그 체계는 자신 안에 구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설명되지 않는 그들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발화한다. 깁슨-그레이엄은 신자유주의에 바깥이나 구멍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일체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러면서 '가정경제', '부불경제(지불하지 않음)' 등의 비자본주의적 시장의 존재가 유령처럼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가부장주의 안에서 비체는 체계와 불화한다. 비체의 전략은 다양하다. 젠더가 허위적이라는 사실을 연기를 통해 폭로할 수도 있다. 미러링 역시 폭력적 남성성을 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 젠더 패러디로 볼 수 있다. '잡년되기 전략'을 통해 스스로 비천함을 자처하면서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가부장주의의 옹호자들을 좌절시킬 수도 있다.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하듯이 여성성을 대표하는 단어들에 씌워진 부정적 의미들을 재전유하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비체들의 전략이 다양하기 때문에 거꾸로 비체들의 곤란이 돌출된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통약불가능성의 함정을 동반한다. 비체들은 자신에게 혐오를 발화하는 이들에게 저항한다. 그러나 다른 비체들 역시 혐오감에 휩싸일 수 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비체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같은 대상에게 저항하면서도 쉽게 소통하거나 연대하지 못한다. 미러링이 젠더 패러디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일시'가 아니라 '잠정적'이어야 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여성혐오를 모방하면서도 그 논리를 벗어나고 있는 '이중적'인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완전한 '동일시'는 "타자를 지배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여성혐오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비체간에 벌어지는 소통 불가능의 한 예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호인정을 말하는 '평등'의 수사학은 어떤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튀세르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인 악셀 호네트의 '인정' 개념을 경유할 필요가 있다. 알튀세르의 인정 개념은 주체화와 함께 복종을 동반한다. 하나의 주체로서 확인받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인정은 그렇기 때문에 기존 지배체계에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보수적인 효과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호네트는 알튀세르의 주장을 거부하면서 인정 개념을 '이데올로기적 인정'과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규범적 인정'으로 구분한다.

가령 당신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인정하더라도, 인정행위가 정작 그러한 평가적 인정을 실현시켜줄 사회적 제도 및 물질적 토대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적 인정이다. 인정행위가 궁극적인 변화와 연결되지 않은 채, 과거의 관계를 재생산하기만 한다면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당신이 내가 좋다고 평가하는 재분배 조건까지도 마련해준다면, 이러한 인정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규범적 인정이다. 이런 점에서 규범적 인정은 언제나 물질적 변화와 함께한다.
(...) 만약 누군가 여성들을 성취경쟁의 동등한 일원으로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실질적으로 그녀들의 성취인정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와 사회적 제도를 구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따라서 젠더를 둘러싼 인정투쟁은 제도적, 물질적 기반에 대한 대안을 동반해야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비체들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언제나 복수의 비체들이기 때문이다. 비체는 자신을 설명할 뚜렷한 언어를 갖고 있지 않고, 혹은 있다 해도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투명하지 않으며, 심한 경우 서로를 혐오할 수도 있다. 경계를 지키려는 남성들에게 여성 비체가 이해할 수 없는 급진적 타자이듯, 비체들 간에도 서로 이해하기 힘든 급진적 타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체에 의한 비체의 혐오는 여성혐오 집단의 혐오보다 더욱 통탄하기까지 하다. 서로의 처지가 비슷한 줄 알았던 사람에게서 날아오는 비수는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비체들 간의 소통의 문제, 내가 앞서 언급했던 통약가능성을 놓고 깊게 고민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하기 힘든 비체라서 서로에 대한 인식보다 혐오나 분노의 감정이 앞선다면, 비체들은 서로 소통하거나 연대할 수 없는 것인가? (...) 어떻게 우리는 혐오를 넘어 소통할 수 있는가?"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전통적 정의론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했던 도덕적 감정인 수치심(shame), 동정심(sympathy), 동감(empathy)를 후보로서 하나씩 검토한다.

수치심은 완벽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기 때문에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있다. 동정심은 불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대상에 비해 자신이 우월함을 유지하는 선에서만 기능한다. 동감은 동일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타자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거울보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동일성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궁극적인 대안으로 길리건과 위진스가 제시하는 '공감(co-feeling)'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공감은 자아가 타자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상호의존관계를 맺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신이 완성되기 때문에 자아는 타자에게서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의 다름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공감은 자아가 타인의 삶에 참여하면서 완성된다.

공감은 타자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진정으로 누군가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그의 곁에(with)서" 나와 다른 그의 상황과 감정을 함께 경험한다는 의미이지, 그와 동일하게 느낀다거나 그의 옆에서 거리를 두며 그를 판단한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공감을 통해 나는 나와는 다른 타자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누군가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경험에 비추어 그/녀를 판단하기보다 그/녀가 처한 상황이나 조건, 경험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그/녀의 고통에 참여한다면, 나는 이를 통해 경험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 타자의 차이를 경험하는 공감은 타자 속에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동감과는 대조적이다. (...) 따라서 공감은 경험의 확장 속에서 자아 자체를 변화시킨다.

(...)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약 누군가 왜 이렇게 힘들게 비체들에게 공감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버틀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아가 있고 타자가 자아 밖에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오히려 타자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나는 내가 겪는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된다." 따라서 나는 나를 알기 위해서라도 너를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오직 "너는 누구인가"를 물음으로써만 알아갈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공감은 비체를 연결시킨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라도, 네가 너를 알기 위해서라도 비체로서의 서로를 묻고, 서로의 경험에 참여하고, 공감하는 과정 속에서 상대가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비체들은 '공감'으로부터 비로소 혐오하지 않으면서 접점 또한 넓혀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비체'들의 '공감'에 기반한 '연대'를 촉구한다. 기다란 고뇌 끝에서 내놓을 수 있었던 책의 마지막 문장의 외침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나 또한 경계 위에 발을 내디딘 한 명의 비체가 되어볼까 한다. "비체들이여, 공감하라 그리고 소란스럽게 연대하라."

P.S) 지면 상 도시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혐오적 발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대목을 생략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파트인데다 재밌으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손 쉬운 공감'이라는 이름의 값싼 폭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