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Oct 21. 2017

'손 쉬운 공감'이라는 이름의 값싼 폭력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김윤아 - 키리에


“만약 개별성의 어떤 부분이 동일성에 저항하거나 흡수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타자의 고통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자기성찰적 의식과 연결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만이, 즉 나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 있는 고통만이 타자와의 고통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뿐이라는 점을 자기성찰적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 타자의 고통이 진정한 나의 것으로 수용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고통에서 내 고통을 발견하려는 타자의 자기화로는 부족하다. (...) 타자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느끼는 감각의 나눔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타자화라는 전제 초월적 방식이 필요하다. (...) 그런데 고통을 재현한 자의 책무는 무엇일까. (...) 그것은 “전개되는 사건의 상황에 참여자가 직접 ‘답변한다’는 의미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 김기란, <감각 나눔의 윤리, 문화예술의 책무 - 행동주의 연극의 정치성과 재현의 윤리>, 29~30p




최근 방청했던 세바시 강연에서 어느 여형사는 성추행 피해 아동사건 수사 경험을 말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법이, 경찰이, 사회가,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수치심'을 강요하고 있다고. 피해자들을 위하고자 하는 나조차도 그러고 말았다고. '성적 수치심'이 성범죄 성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건이므로 안타까운 마음에 형사도, 판사도 성급히 묻는다. "추행 당시에 어땠어? 수치스러웠니? 부끄러웠니?" 그러나 후에 피해 아동은 '수치심'이라는 부끄러운 감정보다는 당황과 공포를 느꼈다고 털어 놓았다. 정말이지 성범죄와 부끄러움이 연결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법감정이 아직 성적인 이슈에 대해 여성들이 무조건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정조관념에 기대고 있다는 근거 아닐까. 온전히 공감하지 못하면서 피해자를 위하자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거대한 모순처럼 보인다.

한편, 공감의 실패는 인간과 인간이 부딪히는 모든 영역에서 문제를 몰고 다니는 게 아닐까 싶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는 왜 지구 반대편의 전쟁 피해자에게 공감하려 하는 걸까? 그저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윤리적 행위의 의의가 절감되는 느낌이다. 일단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소개된 공감(Sympathy)의 정의는 ‘같이(syn) + 느끼는 것(pathy)’이다. 공감의 대상이 아픔을 느낄 때 나도 즉각적으로 동일한 만큼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남주인공 토마시의 공감은 살을 부대끼고 사는 여주인공 테레자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잔 손택의 문제의식은 사실상 얼굴도, 존재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위한 상황에 닿아있다. 이 책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주장을 과감하게 요약하건대 아마 알지도 못하면서, 알 필요도 없으면서 정말 공감할 수 있냐는(보통 이해로부터 공감이 시작된다고 하니까) 비판적인 문제제기다. 또한 우리가 매체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하지만, 그 매체라는 것이 현실을 재구성하는데 정말 성공하고 있냐는 것이다. 만약 실패하고 있다면 우리가 매체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됐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전쟁을 뉴스를 통해 전쟁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발상만큼은 착각이고 오만이다. 월터 리프먼은 "오늘날 사진은 상상력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게 됐다. (...) 사진은 완전히 현실이 된 듯하다. (47p)"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진은 사진작가의 주관이 개입한 결과물이다. 뉴스가치는 언론 산업의 논리에 따라 극적인 사건들의 극히 제한된 파편만을 유통시키며, 특히 무엇이 '보여지지 않는지'를 보여줄 수 없다. 따라서 이를 '현실의 증거물'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아무리 크더라도 타자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 타자가 나처럼 생각하고 각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도 자주 잊는다. 그 폭력성은 ‘미개한’ 타자가 스스로 입을 열 때 본색을 드러낸다. 자신이 그린 연민과 다른 그림이 나오면 못들은 척 하거나 가치 절하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대한 것을 보려고 한다. 그러나 ‘본다’는 개념은 전적으로 대상의 본질을 취사선택하고 편집하여 내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행위이며, 권력이 반영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선이 약자를 향할 때는 특히 이러한 권력의 존재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내는 연민은 피해자의 고통을 관음증의 땔감으로 소모하는 한편 “나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무력감을 위안 삼는 방식에 지나지 않을 위험이 있다. 손탁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 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167p)"

그렇다고 구체적인 대안이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내 생각에 그녀의 메시지는 이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들의 존재를 극적인 것으로 꾸미지 않고, 무력한 모습을 과장하지 않고, 전쟁을 둘러싼 문제들을 추상화 시키지 않고, 매체 이미지가 연출하는 현장이 온전한 재현이 아닌 선택된 광경을 깨닫고 성찰하는 소박한 태도 그 자체에 있다고, 그러니까 중요한 포인트는 전쟁을 ‘소비’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이다. 서두에서 수잔 손택이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를 인용하는 대목(22p)은 어떤가. 손택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단지 추측된 것일 뿐인 공유된 경험"을 근거로 "우리"라는 동질감을 간편하게 느껴버린다.

소비는 간편하다.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 위험에서 멀리 떨어져 의자에 앉은 채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164p)” 이것은 결코 간편한 문제가 아니다. 마땅히 ‘왜 우리가 공감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의심스럽게 던지는 태도가 강력하게 요청되어야 하는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의심하지 않으면 의식할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르바는 '몸의 문법'을 살았노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