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1. “늙은 수다쟁이들은 빌려서 치장한 장신구(리본, 가짜 눈썹, 얼굴에다 찍어 붙인 점, 브래지어)를 모조리 벗어던졌다. 토하기 직전인 그들을 보고 있으려니 역겨움과 큰 연민이 동시에 느껴졌다.” - 28p
- 문명의 이기(상부, 장식)가 발달했다고 여겨지는 사회일수록 역설적이게도 진리의 일부인 신체(하부, 토대)는 억압당하고, 배제되고, 관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조르바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란 육체가 싣고 다니는 짐짝이다. 육체가 온전치 못하면 정신은 내동댕이쳐진다. 온몸을 이리저리 치장한 늙은 여성들이 멀미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육체가 이상신호를 보내는 한 문화적 치장물이나 규칙, 규범은 그저 잡동사니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진리를 마주하는 순간은 그런 위기의 순간에 맞닿아 있다. 정신은 육체 없이 온전한 기능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2.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그래, 팔과 가슴이 뭘 합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방울 흐르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 321p
- ‘교육받지 못함’과 ‘이해하지 못함’은 다르다.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학벌주의는 계급적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1970년대 뉴욕 어딘가의 흑인 빈민가에서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반영한 힙합 가사가 탄생한 이유, 민주주의의 1인 1표제와 다수결 제도가 정당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타인에 대한 공감에 성공과 실패가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지식에 권력을 부여하고 경험에 비해 우선시하곤 한다.
3.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내가 대꾸하지 않자 조르바가 계속했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 148p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라! (...) 과수댁이 당신 앞을 지나거든 냉큼 붙잡으시오. 결혼하고 애 낳고... 하시오. 망설일 것 없어요! 젊은이들이야 까짓 말썽 같은 걸 겁낼 필요 없지!” - 238, 240p
- 누가 말썽을 ‘말썽’이라고 정의했을까. 자하리아라는 수도승이 광대로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도 조그마한 말썽이다. 그러나 그 ‘말썽’의 속뜻이 진정으로 말썽의 영역에 속하는지는 두고봐야할 일이다.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잊은 채로 너무 많은 ‘마시멜로’를 탐내느라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망치기도 한다.
4. 인간에게 있어 자유란 무엇인가. ‘스타리브다키’에게는 그리스 민족의 무사귀환이고, ‘카라얀니스’에게는 조국이라는 의무로부터의 해방이다. ‘롤라’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고, ‘조르바’에게는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욕망에의 거짓 없는 응답이다. ‘나’에게는 번뇌로부터의 해방이고, 오르탕스 부인에게는 오히려 과거의 환상에 갇혀있는 편이 자유에 가깝다. 그러니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방식 또한 각자 다르다. 예컨대 ‘나’는 금욕을 통해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려고 했고, 거꾸로 조르바는 욕망을 억압시키지 않고 표출하면서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르바와 ‘나’ 사이의 상호보완(정신-추상 & 육체-구체)이 주는 메시지를 참고했을 때 단순히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해서는 불완전하거나 자기기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카라얀니스’는 유럽인들이 지겹다는 이유로 유럽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리곤 아프리카에서 육체노동을 즐기며 이런 고뇌를 잊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고 육체노동의 즐거움에 굴복한 쪽에 가깝다.
또 하나의 예시로서 조르바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너는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고? 그래요. 싫어요, 싫어요, 자유가 싫어요!(222p)”,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 이후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니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에요. 기껏해야 절뚝절뚝 걸을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100p)”. “닥쳐요, 닥쳐! 두목, 이런 이야기를 내게 뭣 하러 합니까? 왜 내 마음에다 독을 푸는 겁니까?(266p)”
5.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보고 있으려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쾌활하고도 단순하게 세상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 그의 몸과 영혼은 얼마나 조화로운 하나를 이루고 있는지! (...)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 그의 시는 핏기도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는 것 같았다. (...) 흙과 씨앗으로 가득한 심장의 뜨거운 갈망이 완벽한 지적 유희, 현학적이고 복잡한 허공의 구조물이 되어 버렸다.” - 194, 195p
“[답답한 형제군. 신문이 있어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게 아닙니까?] (...)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들은 세상을 버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길에는 대도시, 상점, 여자들 그리고 신문이 투영되고 있었다.” - 279p
- ‘나’는 조르바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든 행동거지의 순수성을 동경한다. 오르탕스 부인을 추모하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조르바가 부인을 애도하는 방식은 ‘애도’라는 추상적 단어에 기대지 않는다. 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필요한 시간과 고통을 들여 차근차근 삭여낼 뿐이다. 그 어떤 추상적 단어를 동원해 성급히 생략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가 붓다를 극복하는 장면이 중요하다. 붓다와 같이 신체로부터 후퇴하는 개념을 ‘형이상학의 채’라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추상적 개념들은 실제 현상으로부터 주체를 한 발짝 물러서게 한다. 진리를 쫓은 결과 오히려 진리로부터 후퇴하고, 이성에 의해 신체가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수도승, 수녀들은 이러한 모순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실패자들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실상 ‘하느님’, ‘조국’, ‘이성’ 같은 거대한 단어를 사용하려는 자는 이러한 단어가 지니고 있는 곤란을 극복하는 균형감각과 지혜를 지녀야 하며, 이를 말과 글이 아니라 춤이나 이야기로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적 소통방식은 ‘대가리 가죽이 두꺼운’ 이들, 즉 ‘대중’의 변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연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단어들은 대중을 희생시키는데 거리낌이 없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