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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과연 소설로서 훌륭한 걸까?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82년생이면 2017년 기준 36세다. 여성혐오적 현실을 '김지영'이라는 가공의 여성을 대표로 세워 비춰낸 소설이다. 시사교양 PD 출신 답게 다양한 통계를 제시한 만큼 현실과의 정합성을 의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작품의 소설로서의 만듦새는 결코 호평할 수 없을 것 같다. 소설이 그려내는 부당한 현실 그 자체와 소설로서의 가치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 좋은 소설의 조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먹는다. (...)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충실히 보여주는 위장이 좋은 위장이 아닌 것처럼 (...)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는 (정치학적, 사회학적) 2차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탕진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82년생>은 너무 투명한 위장인 셈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기준을 제시하자면 그는 소설을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 전략"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소설이 현실성을 갖추기 위한 세 가지 기준은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82년생>은, 조남주 작가가 그려낸 '한국의 보편의 여성들이 겪어온 수난사'는 어떤 세계에서 어떤 문제를 설정하고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해결책이란 현실의 특정 문제를 일소할 신의 한 수가 아니다. "우리가 '해결의 현실성'을 말할 때 그것은 실현 가능하냐 아니냐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SF든 신약이든 다 괜찮다). 이 선택이 과연 우리 시대의 정치적 지평에서 래디컬한 상상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82년생>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다소간 혹은 전적으로 보편적인 인간형 뿐이다. 이 점은 이 작품의 특징적인 면으로 언급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캐릭터들의 보폭을 제약하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김지영의, 그리고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입체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납작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게으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작가가 김지영의 발버둥을 통해서 현실 앞에 무기력해지는 여성상을 고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캐릭터를 다소 가학적으로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았나 싶다. 김지영이 매 상황마다 저항을 만나 좌절할 때도 현실적으로 어떤 시도를 하기보다 그저 통계자료가 그녀의 좌절을 뒷받침 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를 좌절시킨 남자는 나쁘고, 여자는 불쌍하다. 그러나 절대 김지영은 그녀를 좌절시킨 여자들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메시지는 뻔하다. 중요한건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득력 있게 그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심지어 대부분의 갈등이 작위적으로 그려지면서(ex. 남편과의 야구장, 알아서 하는 여자들, 결말부의 의사) 메시지 그 자체로도 어느정도 기능했을 카타르시스의 순간 마저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82년생 김지영>은 가부장제의 심장부를 겨냥한 페미니즘 소설인가, 아니면 그저 개인의 넋두리를 분별없이 늘어놓은 불쏘시개에 불과한가. 차라리 고발르포의 형식이었다면 어땠을까. <82년생>은 현실에 너무 많은 닻을 내린 탓에 공감과 상상력의 빈곤의 숲을 헤메다가 말라죽은 소설이 아니었을까. 많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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