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는 건 도대체 어떤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걸까? 예컨대 이런 거다. 군대에서 과거에 어느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치자. 중간 위치의 간부들은 그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쪽으로 자신의 합법적/비합법적 수단을 활용하려는 유인을 강하게 받는다. 이러한 경향은 그 아래 위계에 있는 간부에게로 차례로 넘겨진다. 그러나 명령의 상류에서 툭 던진 말은 하류에 이르러 일상을 질적으로 바꿔놓는 파급효과를 낳는다.
결국 시간이 흘러 최초 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부대를 떠나도 이 상황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단지 시스템을 관조하지 못하게 만드는 정보 불균형의 문제와 “군대가 원래 그렇지 뭐” 하는 일상의 편견이 빚어내는 불합리다. 여기서 역사는 주머니 속에 넣어뒀다가 잔뜩 꼬여버린 이어폰 줄을 풀어내는 차분한 손길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맥락이 닿는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표적으로 이제 와서는 너무도 당연한 ‘자연권’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 같은 게 등장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거의 개의치 않는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211p)" 유발 하라리의 이 문장은 내가 앞서 설명한 모든 것을 압축해 담고 있다. 인간을 둘러싼 많은 신화들이 이와 같은 집단적 믿음과 구조적 망각(이 역시 일종의 ‘역방향’의 믿음이다) 덕분에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인간의 삶을 발전시켜왔고, 지탱해왔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부조리의 온상인 ‘허구’, ‘신화’, 혹은 ‘가상의 실재’의 실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체 무슨 소용이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허구다’ 라고 말하는 건 좀 무책임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호모 사피엔스 종의 행동원리와 그 행동원리가 그려온 역사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인간이라는 종의 껍데기, 외피, 즉 제약에 대해서 강조하고 반복해 설명하는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아마 그 껍데기가 부서진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 위한 사전작업은 아니었을까.
인류가 자연선택에서 지적설계로 넘어가는 순간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335p)" 우리는 언젠가 우리 자신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 마음의 모양새 까지도 설계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339p)” 미래의 모습을 도출할 수는 없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다. 상상이란 그렇게 강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