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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Oct 21. 2017

공짜 점심은 없다, 기술도 그렇다

니콜라스 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왜 더 이상 인쇄활자를 읽지 않는 걸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는 이유는 내 앞날에 낀 먹구름 때문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종이신문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언론사에 수익악화라는 위기가 찾아왔고, 그 여파의 자그마한 파편 중 하나가 아무것도 모르고 ‘신문’방송학과에 ‘글쓰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입학한 내게 직격탄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컴퓨터를 배울 용기(아니고 사실 도망)를 내기에는 양심과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저널리즘의 배경은 이제 명백히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환경으로 옮아갔다. 그러나 니콜라스 카의 관점에서는 단지 저널리즘만 이동한 것이 아니다. 컴퓨터로 인해 ‘구텐베르크 문화’라는 인쇄활자 시절의 인간의 인식 매커니즘 자체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설명해야 한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원리 자체가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문화라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뇌의 사고회로를 신경학적으로, 물리적인 차원에서 바꿔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의 틀은 저널리즘이나, 활자 읽기보다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서 재조정되어야 한다.
     
니콜라스 카는 뇌가 유년기의 학습에 의해 평생을 고정된다거나, 진화심리학의 주장처럼 유전자 차원의 어떤 요인들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적으로 제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편견을 깨기 위해 필요에 의해 뇌가 끊임없이 재조정된다는 ‘신경가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여기에 곁들여 인간의 매체를 통한 지적 역사를 거꾸로 되짚어오는데,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인간의 신체나 감각기관의 기능을 확장하는 것은 모두 미디어”이며 “그것은 인간의 신체를 확장시키고 이내 본래의 감각을 마비시킨다”는 마셜 맥루한식 미디어관이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문명의 이기를 안겨줬지만 동시에 그 획득분에 대한 크고 작은 감각적 소외 또한 떠맡겨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정도쯤은 크게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내적인 논리가 인간 스스로가 그러한 가치판단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지적인 보호막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지적 기술’인 “지도, 책, 컴퓨터”가 인간의 인식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켰지만, 모두가 얻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잃어버린 것을 셈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기술의 획득에 대해 인간성을 부분적으로 지불했지만, 사실 인간성에는 가격이 직접 붙지 않으니까 말이다. 모두가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며 떠들고 다녔지만, 기술의 진보는 예외적으로 ‘공짜 점심’ 취급을 받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시대에 와서야 인간성의 위기가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퇴행하지 않으며 이 흐름은 불가항력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성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은 자본주의를 통해 발전해왔다. 자본주의는 ‘인간성’이라는 변수를 품을 수 있을까?
     
나는 몇 년 전부터 꾸준하게 피상적인 인간관계 연결, 정보 홍수, 필터버블 등의 문제를 생각할수록 SNS라는 기술이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무려 20C 중반, 롤랑 바르트가 아무리 ‘완성된 작품’이란 없고, 단지 독자의 끊임없는 해석으로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텍스트’가 있다고 했다지만, ‘완성된 기술’로서의 페이스북을 상상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완성이란 아마 기술의 ‘사회적인 완성’의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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