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네트워크 분석이라는게 참 껄쩍지근해 보이는데 또 그럴듯 하기도 하고 그렇다. 각 노드의 특질보다는 그것들간의 연결관계의 형태를 밝혀내고, 전체 연결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한다. 즉, 작은 그림보다는 큰 그림을 보면서 의미를 도출한다는 관점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피에르 바야르 역시 이와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그가 주장하는 '비독서'의 형태 중 하나는, 모든 책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책을 필사적으로 배제한 어느 도서관 사서와, 그 사서를 보며 아연실색하는 어느 장군의 예시를 통해 아주 적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사상들 사이의 모든 소통과 원하는 연결선 설정을 가능케 하는 철도 노선표 같은 뭔가에 관해 몇 마디만 덧붙이고 싶네. (...) 어떻든 덕택에 나는 그 도서관의 성소 중의 성소에 있게 되었다네. 마치 어떤 이의 두개골 속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었어. (...) 테이블과 연단 위에는 오직 카탈로그와 도서목록들, 지식의 정수뿐이었지. 오직 책들에 대한 책들뿐, 읽는 책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네.
소통과 연결선들, 교양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 특정의 어떤 책이 아니다. 그것은 철도 교통 책임자가 여러 기차들 간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시 말해서 그는 특정 객차의 개별적 내용물이 아니라 기차들이 어떻게 교차하고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29~30p
잠시만 나와 함께 추억에 잠겨보자. 나는 항상 궁금했다. 기자가 되려면 언론고시를 공부해야 한다던데, 그리고 흔히 말하길 '언론고시에는 범위가 없다'던데, 그렇다면 이 공부의 끝은 정말 존재하지 않고 그냥 내가 준비한 부분이 나오면 땡큐인 운빨 좆망겜일 뿐일까? 공부... 공부... 공부라는게 대체로 지식의 양을 늘리는 과정을 뜻하니까,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씹어 삼키면 되는 일 아닐까? '기자'라는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지식의 범위와 깊이란 어느 정도일까?
그래서 한 때는 직접적으로 상관 없는 지식을 아무거나 주워 섬기면서 이것도 언론고시 공부하는거라고 스스로 자기위안 삼기도 했다. 그러나 아닌 것 같았다. 범위는 존재하고, 내용에도 대개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던 것 같다. 대단히 공부한 것도 아니었지만... 뭐, 이제와서는 진짜 쓸모 없는 일이지만 한 번쯤 가상의 취재 상황을 놓고 필요한 지식을 따져보는 게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 같다. 한 번 따져보자.
국정원에 대해 취재한다고 해보자. 뭐 원세훈 전 국정원장 얘기가 나온다. 우선 국정원이 무슨 일을 하는 조직인지 알아야 하겠군. 그리고 국정원 내에서 어느 부서가 어느 기능을 하고, 그 중에서도 어느 자리가 1티어인지 알아야 된다. 국정원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이며, 임무를 부여하는건 누구인지, 그와 관계된 인물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그 이후에야 댓글조작을 통한 대선개입 사건이 왜 이렇게 난리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정부조직법, 방첩활동, 행정학, 정치학처럼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면 물론 더 깊은 식견에서 우러나오는 의견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문제의 핵심에 다가서는 결정적인 뭔가가 될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사회 각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느 노드에 연결이 집중적으로 걸려 있는지, 누가 네트워크의 연결망을 중심에서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 여부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이해 당사자와 연결된 사람이 누구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기자 의 일.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는 일은 대개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언론고시 필기 공부는, 깊이 있게 하는 것보다는 잡다한 걸 많이 연결시켜 머릿속에 들고 있는 쪽에 초점이 맞춰지는게 아닐까.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
(...)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그 책을 꿈꾸거나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호기심과 교양을 갖춘 사람은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한 번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일련의 이미지와 인상들을 떠올리게 되며, 이 이미지와 인상들은 일반 교양이 책들 전체에 부여하는 표상의 도움을 받아 곧 최초의 견해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31p, 33p
즉, 피에르 바야르는 책의 전체 집단인 '집단 도서관' 속에서 개별 '책'이 관계 맺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를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배경인 '사회' 속에서 개별 '사건/대상'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이해하고 활용하는데 특화된 집단을 '기자'로 보는 관점이다. 기자에게 필요한 지식은 예컨대 사회라는 총체들 사이에 얽힌 노선도 그 자체라는 얘기다. 홍대입구역이나 성수역 그 자체에 대한 어마어마하게 전문적이고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필요한데 모르면, 그냥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면 됨.
오히려 일부 분야에 대해 '잘 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전체보다는 부분의 시각으로 쏠릴 만한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어쩌면 진정으로 훌륭한 기자가 되려면 어느 소설의 어느 사서처럼, 필사적으로 관계의 총체에 대한 시각만을 순수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만 해본다. 생각만... 기자들은 무엇이든 말하고, 거침이 없으므로, 아는게 많다. 많아 보인다. 많아 보이는걸까, 진짜 많은걸까. 음, 오늘도 또 다시 너무 많이 말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