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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Feb 21. 2018

‘밥’, ‘계절’, ‘엄마’ - 그 행복한 시차에 관해

<리틀 포레스트> 시사회 @ 신촌 메가박스

브런치 무비 패스 작가로 선정되어 뜻밖에 6개월 간 시사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아마 수많은 브런치 작가분들이 후기를 쓰실 테다. 그렇다면 내가 독자 여러분께 굳이 중복된 정보를 제공하여 시간과 지면 낭비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대한 배경 없이 본 사람 입장에서 내가 느낀 바를 정직하게 적는 연습을 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0. 시놉시스


<리틀 포레스트> 예고편, 2018.02.28 개봉
“시험, 연애, 취업...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혜원(김태리 분)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 친구인 재하(류준열 분), 은숙(진기주 분)과 특별한 사계절을 보내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


내가 느낀 것을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시차’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밥’, ‘계절’, 그리고 ‘엄마’에 관한 시차를 다룬다. 이 세 가지 시차에 관한 내 생각을 설명하고자 한다.


다소 분석적이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시 곱씹어 볼 때에서야 도움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뒤에 여담으로 붙이려고 하던 이 영화 자체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서두에 먼저 붙여본다.


<리틀 포레스트>는 예쁘고, 귀엽고, 잘생긴 배우 셋에 댕댕이 한 마리 까지 더해서 바라만 봐도 저절로 즐거운 풍경을 만든 다음 그들 사이의 케미스트리를 십분 활용한다. 거기에 때깔 좋은 음식을 시청각을 모두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등장시킨다. 그들은 농촌 생활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소일거리를 하루하루 해나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얘기했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보따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말 좋았던 것은 배우들의 외모보다도 배우들 간의 케미스트리였다. 나와 함께 동행한 미희는 “스크린 속 정갈한 음식도 맛있어 보이지만 세 캐릭터의 케미가 더 맛깔나는 영화였다”고 평했다. 정말로 그렇다.


‘웹드라마’스러운 신선하고 단촐한 캐스팅 및 영상에 입혀진 감성이라든가 ‘먹방-ASMR(정확히는 해당사항 없지만)’ 같은 유튜브 콘텐츠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어쩌면 기존에 존재하던 걸 했을 뿐인데 저런 문법이 보편적으로 퍼지면서 관객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게 뭔소리냐면 영화 내내 초-고퀄의 유튜브 먹방 혹은 식욕자극 동영상을 보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청춘'을 다룰 때 흔히 빠질 수 있는 훈계조와 과잉낭만 사이 함정에서 좋은 균형감을 보여줬다. 관객들이 가슴 속에 따뜻한 느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 영화가 설정한 지상 과제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목적이 뚜렷한 만큼 영화의 요소들이 그 목적을 향해 잘 배열되어 있다. 영화의 서사가 느슨하게 놓여 있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숨 가쁘게 사건과 사건이 흘러가는 식의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매 장면이 주는 즐거움을 그대로 만끽하면 된다. 단순한 ‘도시-시골’의 이분법으로 문제를 단순화 시켰다는 비판은 이런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용서될 수 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열린 결말을 채택함으로써 관객이 힘을 차려 현실로 돌아가 직접 자신의 문제를 대면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쳐주고 싶다.


한국영화 특유의 ‘비빔밥 메타’가 없어서 너무 좋았다. 예컨대, 목놓아 터지는 감동 두 큰 술, 사회에 대한 분노 한 큰 술, 웃픈 유머 한 아빠숟갈 넣고 벅벅 섞어 와구와구 입에 퍼넣는 식의 구성은 익숙하다. 그러나 이 경우 관객은 관객이 아니라, 방청객이 된다. 관객은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방청객이 웃지 않는 다면 그 프로그램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웃지 않는다’는 방청객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는다. 방청객의 파안대소 웃음은 그래서 피로하다. 러브라인을 극의 긴장감을 유지할 정도로만 활용하여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보존한 선택 또한 박수쳐주고 싶다.


일본 만화와 영화가 원작으로 이미 존재한다. <리틀 포레스트>의 신선함은 알게 모르게 섞인 ‘일본스러움’에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다루는 ‘빈곤한 청년담론’은 영화의 만듦새와는 별개로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한국과 일본은 사회적 선행-후행 관계를 갖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청년을 위로하는 데 사회적으로 많은 공을 들였다. 이런 경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리틀 포레스트>의 수입은 한국의 영화 시장이 청년들이 겪는 고통이 하나의 시장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걸 부정적으로 볼 생각은 없다. 이 영화는 누군가를 위로하기에 충분히 잘 만든 영화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기운을 차린다면 그 몫을 다한 거니까. 나는 다만 이런 현실이 슬플 따름이다.


김태리와 류준열은 '오, 역시 잘해'라는 감상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처음 본 진기주라는 배우는 '우와, 누군데 이렇게 잘해! 게다가 겁나 귀엽잖아!' 느낌이었다. 이 세 배우 모두 기존에 없었던 신선한 느낌을 주는 배우들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를 훨씬 기대하게 만든다.




1. ‘밥’의 시차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옷과 목도리를 꽁꽁 싸맨 혜원은 웬 시골집으로 흘러 들어와 밥을 해먹는다. 하정우도 아닌게 난데 없이 먹방을 시작한다. 워낙 색감과 소리가 생생해 맛있어 보이기 때문에 불만을 갖긴 뭐 하지만 부족한 설명에 관객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아있던 식재료는 금방 떨어진다. 곤란해 하는 혜원 앞에 ‘큰고모’와 ‘은숙’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비로소 시작된다. 혜원은 과거 이 집에 엄마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현재 소식이 끊긴 상태. 혜원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임용고시 준비를 하다가 함께 준비하던 남자친구와는 달리 실패하고 만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야, 어쩌긴 뭘 어째. 일단 밥부터 먹고 보는거다. 현실로부터 쫓기듯 도망쳐 나와 도착한 이곳에서 진정한 첫 끼 식사는 큰고모 집에서 이뤄진다. 큰고모는 연신 “아이고~ 좀 천천히 먹으라니까~”를 연발하고, 혜원은 입 안에 음식을 허겁지겁 쑤셔 넣는다. 단지 뱃속의 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 왜 돌아왔냐고 채근하는 은숙에게 혜원은 글자를 꼭꼭 눌러가며 답한다. “진짜 배고파서 내려왔어.”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배고팠을까. 이 허기의 정체는 뒤로 가며 점차 해명된다. 어쨌든 적어도 그 허기를 서울에서는 채울 수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시골’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급격한 고도 차이는 압력의 변화를 일으킨다. 잠수부들은 흔히 코를 “킁!”하는 것으로 먹먹한 귀를 뚫는, ‘이퀄라이징’을 한다. 몸 안팎의 기압을 조절하여 평형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큰고모 집에서 먹는 첫 끼는 혜원에게 서울과 시골의 시간적 압력을 맞추는 ‘이퀄라이징’이 아니었을까. 서울에서 폐기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편의점 알바 나부랭이에게 여유로운 식사란 사치다. 그런 그녀에게 큰고모는 연신 ‘천천히 먹어’를 반복한다. 서울의 ‘편의점 도시락’과 시골의 ‘밥에 냉이나물 반찬’의 시계는 서로 어긋나있다. 시차는 드러나고 혜원은 적응한다. 그리고 그녀가 “빨리 빨리”와 “천천히 먹어”라는 두 입장의 대비 사이에서 밥을 삼킬 때 관객들은 자연스레 <리틀 포레스트>의 세계로 진입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삶을 이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염세적인 인생관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물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걸음이 쓰러지는 몸을 간신히 받히고 있는 것에 불과하듯이, 우리의 육체적 활동이 가까스로 죽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즉 우리의 죽음은 연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밥을 먹는 일은 쇼펜하우어가 시니컬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쓰러지는 몸을 간신히 받히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 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삶은 이어진다. 혜원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거기서 다양한 추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공장에서 찍혀 나온, 먹어도 허기진 음식이 아니다. 즐기며 먹는 음식이고, 재하나 은숙 등의 친구들과 함께 둘러 앉아 먹는 음식이다. 고작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한다는 건 도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태이자 게으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도 방향도 잃은 채 뛰쳐나가는 도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자신에 대해 충실한 행위이다. 또한 겨우 ‘가까스로 죽음을 방해’하는 일 치고는 영적이며 근본적이기도 하다.




2. ‘계절’의 시차


이 영화를 요약하여 부제를 달아보자면 ‘청춘의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성숙의 겨울’ 정도가 아닐까 싶다.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은 가장 먼저 감자를 심는다. 감자를 심으며 흘러나오는 혜원의 나레이션이 인상적이다. 감자의 싹이 올라왔다는 것은 다른 씨앗을 심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고, 그래서 농촌에서는 일손을 바삐 놀리게 된다니. 자연이란 ‘저절로 그런 것들’이다. 자연은 때가 되면 때를 알려준다. 인간은 자연의 뜻을 번역하여 행동으로 옮긴다.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말이다.


서울에서는 인간이 자연이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들 위에 심겨져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토양은 자연과는 달리 변덕스럽다는 점에서 뿌리가 단단하게 내리기 곤란하다. 자연은 ‘저절로 그렇게 되’지만, 인간 세계가 그렇게 굴러갈 리 없다. 사회의 시계는 계절에 따라 돌아가지 않고, 손목에 달린 초침 단위로 돌아간다. 반면 시골에서 인간은 자연의 중력에 묶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속박 보다는 안정감을 부여하고 실존의 자유를 보장하는 ‘뿌리’가 된다. 혜원 또한 마치 처음 심긴 감자처럼, 자연의 토양 위에 심겨있다.


감자에 싹이 난 이후의 일들이 그렇듯 혜원도 자신의 마음 속에 지난 추억들을 차례대로 심어 나간다. 엄마, 남자 친구, 자신의 서울 생활 등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스스로 차린 밥과 함께 곱씹어 본다. 한 번, 두 번 씹는다. 씹어 삼킬 때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씨를 뿌리고, 추수하고,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계절이 가면서 그녀의 손에는 흙냄새가 배어든다. 봄에 캔 고사리를 말리는 것으로 가을을 기약하고, 가을에 딴 감으로 곶감을 만들며 겨울을 기약한다. 그렇게 그녀는 점차 계절이라는 시간의 질서를 회복한다.


영화 초반부, 은숙은 서울로 올라가 회사생활을 하다가 때려치고 돌아와 농사를 짓는 재하를 소개한다. 혜원은 그를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찾은 친구라고 생각한다. 혜원과 재하는 같으면서도 다른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재하는 혜원을 향해 ‘너는 지금 진짜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얼버무리고 있을 뿐’이라는, 다소 말실수에 가까운 진실을 뱉고 만다. 혜원은 짐짓 밝은 척 웃어 보이며 속앓이를 한다. 잠시 영화에서 벗어나 김경주 시인이 한 인터뷰에서 여행에 관해 했던 말을 인용해보자. “여행 중에는 희곡, 시나리오처럼 여행과 무관한 글을 써요. 역시 글쓰기에 시차가 필요해서죠. 너무 가까우면 의심스러워요.” 내 생각에 그녀는 얼버무리지 않았다. 가까운 것에 대해 의심의 씨를 뿌리고, 충분한 시차가 생길 때까지 싹을 돌보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저 계절의 시차였을 뿐이다.




3. ‘엄마와 혜원’의 시차


'엄마' 역은 문소리 배우가 맡았다.

영화 시작도 전에 엄마는 이미 혜원의 곁을 떠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조금 이상하다. 엄마가 혜원을 버리고 떠났지만 혜원은 굳이 엄마를 찾으려 하지도, 엄마를 적극적으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런 단서들은 혜원과 엄마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혜원은 단지 자신을 깊이 사랑했던, 사려깊은 엄마가 자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려야 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 답을 찾는다면 혜원은 언제든 엄마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엄마에 대한 회상은 모두 음식을 매개로 이뤄진다. 재료를 다듬을 때,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들 때, 마을 어귀에서 나란히 앉아 토마토를 먹을 때가 전부 그렇다. 그 회상 속에서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드러난다. 혜원의 아버지는 일찍이 병을 얻어 가족을 남긴 채 죽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혜원은 구김살 없는 아이로 자라난다. 사랑을 아낌 없이 줬던 엄마 덕분이다. 혜원은 회상 속에서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 쪽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함께 가장의 죽음을 극복한 것이다.


혜원과 엄마는 레시피를 통해 연결된다. 혜원은 엄마에게 배운 레시피를 통해 자신의 끼니를 해결하고, 친구와의 우정을 다지고, 갈등을 해결한다. 그 과정 속에서 혜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엄마의 선택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혜원의 정신적 성숙은 엄마의 레시피에 자신의 색을 입히는 행위에 대한 혜원 자신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초반부, 혜원은 재하와 은숙에게 떡케익을 해먹이는데 재하는 ‘아주머니의 떡은 달고, 네 것은 짜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반부에 냉장고에 붙인 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레시피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레시피 또한 엄마의 것만큼 맛있다는 혜원의 태도다. 이제 혜원은 엄마와 함께 노하우를 주고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한 명의 성인이 되었다는 상징으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엄마는 혜원이 자신만의 ’작은 숲’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부재를 통해 인도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물론 결과론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것을 방치라고 해석하기에는 섭섭할 것 같다. 엄마는 혜원과의 대화의 시간을 통해 자식의 내면을 잘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보고 자식이 뿌리 내릴 장소를 준비해주고, 결정적으로 자식을 믿어준 엄마의 사랑을 보여줬다. 결국 혜원은 엄마가 가지고 있던 마음 속의 ‘작은 숲’을 이해할 줄 아는 성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혜원은 엄마처럼 자기만의 ‘작은 숲’을 가진 사람으로 커나가고자 한다. ‘엄마와 혜원’의 시차가 해소되는 이 과정은 자식의 자율성을 뺏는 극성 부모들이 가슴에 새겨두고 생각해봐야할 뜻밖에 교훈적인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건 진기주 배우가 넘모 이뻐 갖고... 팬심에 넣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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