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버드> 시사회 @ 메가박스 코엑스점
2000년대 초 새크라멘토. 일상에서의 도피를 꿈꾸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 분)은 자신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좁은 집, 엄마와의 잦은 다툼, 어려운 집안 사정. 크리스틴은 내년에 뉴욕의 대학에 갈 계획을 품지만, 고등학교 생활은 쉽지만은 않은데....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메리칸 인디언 오마스 족의 격언이라고 한다. 굳이 출처를 따져볼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렇게 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온 마을이 함께 키우는 ‘키드의 시간’을 거치며 성인이 되어간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건 ‘온 마을’ 뿐만이 아니다.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환경과 맞서 싸우는 갈등 상황에 놓인다. <레이디 버드>는 바로 이 ‘키드’, 주인공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시얼샤 로넌 분)이 빠듯함 속에서 어떻게 자라 무엇이 되어 가는가에 대한 성장을 다루고 있는 영화다.
일생의 전체 구간에서 성장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안은별의 <IMF 키즈의 생애>에서는 성장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키드'의 시간대는 자신에게 축적된 경험과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거기에 책임을 지는 어른의 일을 아직 하지 않아도 되는, 혹은 하는 것이 금지된 시간대다. 그러나 당장은 자신과 주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며, 자신의 선택 가능 범위를 확인하는 시간대이다."
즉, ‘키드의 시간’의 핵심은 ‘금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드’는 어른들이 정해준, ‘무엇이 되어라’를 등지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기 자신이 되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자아실현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든가, 미숙한 사랑 끝에 겪는 이불 걷어찰 만큼의 실패라든가, 그런 지극히 찌질 하면서도 풋풋한 것들은 그 과정의 부산물이다. 우리는 그 급격한 팽창과, 팽창에 따른 갈등의 시기를 ‘사춘기’라고 부른다.
곤란한 점은, 그 팽창이 현실이라는 배경 조건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다는데 있다. 마치 이름처럼 주어져 있는 현실이 이미 그녀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 ‘레이디 버드’는 그녀가 그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그녀는 ‘가난한 맥피어슨 집안의 둘째 크리스틴’임에도 이 이름을 그저 별명이 아닌, 진짜 자신의 이름을 대체하여 쓰고 싶어 한다. 앞서 말했듯 이름은 부모로부터 가장 처음 상속받는 요소라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름이 그녀의 부정하고 싶은 현실인 반면,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이란 뉴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의 빌딩, 뉴욕의 거리, 뉴욕의 라이프스타일. 그녀는 자신의 방에 들어 앉아있어도 뉴욕의 공기를 숨 쉰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라는 도심과는 거리가 먼 동네, 그 중에서도 가난한 가정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동부의 메트로폴리스는 그야말로 딴 세상 얘기인 것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을 거부했듯, 그녀는 자신에게 현실로서 주어진 진짜 현실을 부정한다. SPA 매장 마냥 이런 저런 환상을 한 번 씩 입어본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예컨대 소질이 없는데도 스스로 연기나 수학의 천재라고 믿어버린다든가, 찌질하고 가난해보이기 싫어서 뚱뚱한 아웃사이더 단짝 친구를 버리고 부자인척 하며 일진 급우와 친해지려 접근하는 대목이 그렇다. 게다가 ‘무엇이 될까’ 보다는 ‘무엇이 되지 않을까’에 집착하다보니 가치관은 혼란에 빠지고 스스로를 속이는 데 둔감해지고 만다.
하지만 크리스틴의 이러한 방황은 고집 세면서도 섬세한 그녀 개인의 성향에 의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아이를 키우는 온 마을’의 영향 또한 커다란 요인으로서 함께 존재한다. 새크라멘토의 낙후되고 기독교 교리가 중심이 되는 교육 환경은 그녀의 자유분방함으로부터 잠재성을 끌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즉 그녀의 방황은 적절한 역할 모델을 찾지 못했던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급격하게 팽창한 사춘기의 자아를 채워줄 어른을 찾지 못해 껍데기만 공허한 채로 방치된 거라면, 크리스틴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삶을 연기하는’ 연극에 빠진 것도,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별도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라는 부정적인 현실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부정적인 현실 덕분에 드러나는 가치들을 보여주는 방식 속에 이 영화의 미덕이 숨어 있다.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은 끝없이 갈등을 겪지만 그 갈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작게는 가족, 크게는 새크라멘토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과 믿음 위에서 충돌한다. 서로를 의지해 끝끝내 버텨냈기에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크리스틴은 결국 뉴욕의 대학교로 진학한다. 그녀는 드디어 그토록 꿈꿨던 ‘뉴욕 그 자체’가 되었을까? 그러나 뜻밖에도 대학 입학 후 학우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름을 묻는 남학우의 질문에 자신을 ‘레이디 버드’가 아닌, 그토록 거부했던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어떤 존재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 존재를 더욱 선명히 느끼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인걸까.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를 떠날 준비를 하며 ‘~가 아닌’ 부정만으로는 무엇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친구와, 가족과, 도시와의 관계를 점차 회복해 나간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는 법, 그것이 바로 <레이디 버드>가 말하는 성숙의 의미가 아닐까. 나는 그 이야기 속에서 여전히 미숙하고 편협한 마음을 대어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