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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May 08. 2018

제이콥과 애나, 견우와 직녀

라이크 크레이지 (2011)

견우와 직녀 설화는 익숙하다. 견우와 직녀를 알아서 익숙한 것이 아니다. 만남과 엇갈림의 서사가 익숙한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부로 깨닫고 있는 그 감각 말이다. 그렇다. '라이크 크레이지'는 만남과 엇갈림의 서사이며, 서사적 공통점 이상으로 '서양판 견우와 직녀'로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을 몇몇 품고 있다.

영화의 시선은 LA의 한 이름 모를 강의실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대학교 강의실에서 만나, 쪽지와 눈웃음을 나누다, 수다에 커피를 곁들이다 온다네. 여느 로맨스 영화처럼 시덥잖은 장면들을 던져주며 '애나'와 '제이콥'의 연애가 시작된다. 그들은 침대 위를 뒹굴며 오래오래 행복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오래오래'란 결코 '영원히'가 아니라는 점이다. 애나는 영국 출신 유학생이었기에 학생 신분으로만 미국에 머물 수 있었다. 본국으로 돌아가 비자를 갱신하고 몇 달 후에 돌아와야 했지만 애나는 잠시라도 제이콥과 떨어져 있기 싫었다. 귀국 당일,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엄마의 신신당부에도 불과하고 끝내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이다. 이후 애나는 몇 달 간 LA에 불법체류 하며 제이콥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몇 달 후, 영국의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미국에 재입국하려던 애나는 비자 문제로 입국을 거부당하고 제이콥과 뜻밖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마치 견우와 직녀가 서로 사랑하느라 일에 소홀해지자 두 사람을 은하수 양 끝으로 찢어놓은 옥황상제의 벌처럼 말이다. 대서양은 은하수만큼이나 아득하다. 시차로 인해 낮과 밤이 어긋나 제대로 된 통화를 할 수도 없다. 둘은 서서히 서로의 빈자리를 일로 채워나간다. 처음에 두 사람을 찢어 놓은 것은 입국금지라는 '법'이었으나, 점차 그 장벽은 성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변해간다. 법은 그저 강제로 금지하기에 이별에 대해 저항하게 하지만, 일은 자신을 위한 일이기에 스스로 포기하고 납득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하고 싶은' 운명적 사랑은 '해야 하는' 직업과 일에 자리를 내주며 물러나는 듯 하다.

그녀는 문득 전화기를 붙들고 은하수 같은 대서양 건너 제이콥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한다. 그립다고. 제발 자기를 만나러 와달라고. 언제나 애나 생각 뿐이었던 제이콥은 곧장 비행기를 타고, 영국 땅에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완벽한 재현을 꿈꾸면서. 그러나 언제나 반복은 차이를 낳고, 두 사람은 미묘한 어긋남을 체험한다. 영국에서의 만남과 미국에서의 만남이 다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한 번 더 어긋나기를 선택한 채 각자의 땅에서 각자의 일과, 삶과, 사랑을 찾아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애나는 곧 무엇으로도 제이콥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솔직히 영화를 보다보면 말이 안되는 부분이 많다. 와, 비자 승인 거절 당했다고 저렇게 싸운다고? 개복치인가? 근데 저렇게 찢어졌는데 또 다시 만난다고? 하지만 이봐, 애초에 이런 사랑의 감각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하지가 않다. 감각이란 그 무엇보다도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잠깐 데드풀에서 웨이드와 바네사의 대사를 보자.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잘 맞는 이유."
"뭔데?"
"자기와 나의 똘끼가 끝내주게 잘 맞아. 굴곡이 특이한데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그래도 맞추면 그림이 완성되지."


너 아닌 어느 누구에게서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이 영화의 핵심이다. 사이먼과 샘에겐 안된 일이지만, 애나와 제이콥은 수 차례의 이별과 재회 끝에 끝끝내 서로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 재회 끝에 '행복하게 살았다'는 보장은 없다. 두 사람은 웃지 않는다. 지나간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러한 기억이 두 사람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결말은 이렇게 열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감독의 의도를 감히 들여다보자. 두 사람의 미래는 행복으로도 불행으로도 열려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인생에는 대체되지 않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 운명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위해 인내하라. 두 사람의 미래는 서로를 향한 인내로 채워져 나갈 것이다. 그것으로 견우와 직녀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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