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바이, 웬디> 시사회 후기
자폐란 무엇일까? 자폐증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발달장애를 가리키며,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의사 소통에 대한 어려움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우주복을 입고서 오직 자기만이 존재하는 거대한 우주를 부유하는 느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느낌이란 신체에 속한 가장 내밀한 경험이 아닌가. 직접 자폐를 겪어보지 않고서는 단지 그것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자폐증을 겪는 사람은 언어의 형태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기 힘들어 하기 때문에 직접 겪는다 하더라도 표현이 곤란하기는 매한가지다.
<스탠바이, 웬디>의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을 앓고 있다. 그녀는 재활센터에서 생활하며 인근 빵집으로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생활비를 충당한다. 이는 웬디와 그녀의 언니 '오드리'가 유일한 보호자였던 엄마까지 잃고 나서 더 이상 가족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온전히 사회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던 오드리가 자신의 엄마가 그랬던 만큼 생활을 유지하는 동시에 웬디의 자폐증으로 인한 발작까지 함께 감당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두 자매는 그렇게 긴 시간을 떨어진 채로 성장하게 된다.
웬디는 언니와 떨어져 재활센터에서 지내면서 재활센터 선생님으로부터 세상의 규칙을 학습하는데, 바라보고 있자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하는게 흡사 프로그램으로 작동하는 로봇 같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샤워를 하는데, 만약 생리 중이면 잊지 않도록 엄지를 치켜들고 아니라면 내린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모두 입는 옷의 색깔이 정해져 있고 그 순서에 예외는 없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할 때 손님에게 '무엇을 드시겠어요?' 물어볼 때 어조가 너무 같지 않기 위해서 앞의 억양과는 일부러 차이를 두어 반복한다. 웬디는 이런 규칙들을 일일이 외우고 반복한다.
웬디의 이런 강박적이고 분석적인 면모는 극 중에서 반복적으로 그녀 위로 겹치는 <스타트렉>의 스팍과도 닮아있다. 스팍은 <스타트렉>에서의 설정 상 유머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유머감각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유머가 멸종하기 전 기록된 오래된 문헌들을 분석하고 연구한다. 그러니까 유머를 마치 수학의 방정식처럼 공식으로 만들어 재현하는 것이다. 스팍이 연구를 통해 유머를 재현하는 일은, 웬디가 재활센터 선생님으로부터 할 일을 학습하여 반복하는 일과 원리가 같다. 웬디나 스팍이나 자기만의 우주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스팍의 이런 점에 공감했던 것일까. 웬디는 스팍과 그가 등장하는 <스타트렉>의 세계관에 푹 빠져 그것들을 소재로 한 2차 창작에 몰두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영화는 웬디가 공모전에 출품할 그 시나리오를 위해 아르바이트 빵집으로 가는, 오며 가며 수백 번이고 반복해왔을 길을 함부로 벗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다른 포인트다. 이 영화는 오히려 그녀를 소외시켜온 ‘언어’를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방점을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원 의사에 따르면 공황 상태에 빠진 환자라도 반드시 의사를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며 그 말이 치료의 유일한 실마리가 된다고 합니다. 환자가 말하는 것을 축으로 하여 의사와 환자는 그들 사이에만 통용되는 특이한 어법을 만들고, 의사는 그것을 통해서 환자가 경험하고 있는 내적 세계를 상상적으로 추체험합니다. 한편 환자는 망상적인 내적 세계를 말로 표출함으로써 닫혀 있는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합니다."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204p
언어는 상징의 체계다. 인간은 그 상징의 체계를 공유하면서 서로의 우주에 교집합을 만들고, 소통하고, 협동한다. 자폐증으로 인해 일반인들과 같은 수준에서 언어를 공유할 수 없었던 웬디는 자기만의 우주에 갇힌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스타트렉>은 웬디와 세계가 유일하게 공유하는 세계관이자 문법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웬디는 적어도 <스타트렉>의 세계관에서 벌어진 사건과 인물들의 설정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가상의 세계에서 만큼은 그녀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이를 매개로 타인이 웬디에게 접속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앞서 말했듯 스팍은 웬디의 페르소나다. 그녀는 스팍을 통해 숨쉬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실과 자신이 창작한 가상의 세계는 그 경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나리오 속 대사를 통해 현실에서 봉착한 역경을 해결하기도 한다. 즉, 이제 웬디는 바깥의 세계를 단순히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스타트렉>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스스로 타인과 마음의 접촉면을 넓혀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공모전에서는 떨어졌지만 대신 그녀의 시나리오가 그녀의 주변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웬디의 자폐증은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섬에 고립된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언어라는 빈약한 도구를 통해 서로 떨어져 있는 마음과 마음이 간신히 가닿으며 살고 있을 뿐이다. 소통 가능한 적당한 표현법을 찾는 것이 빨랐냐, 느렸냐 하는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 웬디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을 칭찬할 수도, 그 주변인들의 인내심에 감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란 얼마나 공기처럼 사소하고도 한편으로는 기적 같은 일인가 생각한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소중하다. 나의 우주에 당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