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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r 13. 2021

이방인으로 받은 친절들

나는 내게 남겨진 든든한굿럭! 을기억한다.


이방인으로서 받은 친절들


 마카오 거리 한복판, 홍콩으로 가는 페리 출발은 30분도 남지 않았고 핸드폰은 꺼졌다. 땀과 곤란함을 비처럼 흘려내며 우리는 길을 찾고 있었다. 건물 경비병으로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검은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보였다. 나는 정신없이 물었다. “위 원트 고 페리, 고 홍콩..”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영어를 지어내 곤란한 상황을 설명했다. 검은 제복의 구원자는 영어와 손발을 섞어 페리 선착장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할 능력과 시간이 없어 땡큐! 한마디를 크게 외친 채 급하게 달렸다. “굿럭” 구원자의 마지막 인사가 들렸다. 


페리 시간에 맞추어 겨우 선박 위로 몸을 쑤셔 넣은 채 잠시 숨을 돌렸다. 숨이 좀 진정되자, 길을 알려준 경비병에 대한 고마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그 사람 진짜 고맙다.”며 그의 늠름한 용모와, 친절한 마음씨,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굿럭! 을 외쳐 준 섹시함을 칭찬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평생 잊히지 않으리라. 이처럼 낯선 곳에서의 친절함은 깊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혼자 네팔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기억도 있다. 오후 5시 즈음에 밥을 먹으러 갔다. 주문한 풍성한 향의 카레와, 갓 구운 난을 입안에 넣었다. 낯선 곳에서의 식사였지만, 이들에게는 집 밥 이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몽실몽실해졌다. 식사 후 덥혀진 몸과 느슨하게 풀어진 기운으로 계산을 하고 나무문을 밀어 거리로 나갔다. 


창문이 없는 가게라 몰랐는데,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네팔은 서울과 달리 가로등이 많지 않고 늦게까지 하는 가게도 별로 없었다. 가까운 거리를 걸어왔어도 낮과 밤의 풍경은 생경했다. 가족과 고향 등의 따스한 내음과 풍경을 추억하고 있던 머릿속에 ‘길을 잃었다’는 경보가 울렸다.


당황해서 핸드폰을 찾았지만,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았다. 가방에서 그때까지는 계획을 위해 사용했던 네팔 여행 책을 꺼냈다. 책에는 맛집, 호텔, 카페 등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지도가 동봉되어 있어 나 같은 불행한 여행자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길을 대조해보았다. 하지만, 지도는 어둑해진 거리 상황까지 반영하지는 못했다. 가게 간판들이 보이지 않아 길을 찾기 어려웠다. 


미간에 주름을 쓰며 책을 보고, 고개를 들어 희미한 간판을 대조하여 길을 찾아갔다. 고개를 왔다 갔다 하던 그때, 겨드랑이 아래로 까실한 기운이 느껴졌다. 


“헤이”


까까머리를 한 네팔의 꼬마 아이가, 내 겨드랑이와 팔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어디를 찾는지 물었다. 호텔 이름을 말하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네팔 말로 친구들을 불렀다. 똑같은 까까머리의 친구와, 얼굴에 큰 점이 있는 아이가 다가왔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책을 보고 뭐라 뭐라 얘기를 했다. 큰 점이 있는 아이가 뭐라고 안건을 제시하고, 친구들의 고개 끄덕임으로 승인을 받더니 냅다 달렸다. 


네팔 말을 몰라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애써주는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다. 냅다 달리던 점이 있던 친구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옷깃을 잡아끌었다. 아이의 손길에 이끌려 가다 보니, 점차 익숙한 가게들이 눈 앞에 보였다. 아이는 길을 확인해보려고 동네를 한 바퀴 뛰었다가 온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도움을 줬다는 기쁨과 쑥스러움으로 어색하게 웃더니 후다닥 뛰어 사라졌다. 이 일이 있기 며칠 전, 한 네팔인이 나를 도와준 뒤 돈을 요구했던 적이 있다. 돈이 없다고 하니 그는 손가락 가운데를 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꼬마들에게 받은 살가운 친절이 지난번의 불쾌함을 씻어주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친절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말이 통하지 않고, 생김이 달라도 인간에게는 누구나 친절과 다정함이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이다. 곤경에 처하면 도와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구나 하는 도덕책 같은 천연한 생각이 든다. 


반면 그렇지 않은 일들도 사방에서 발생한다. 얼마 전만 해도, 짧게 핸드폰을 빌려 주고받는 사이 몇 백만 원의 거금을 사기당한 뉴스를 봤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대답을 해주면, 길을 갑자기 내 안위를 궁금해하며 조상신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친절은 더 주기 조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내게 남겨진 든든한 굿럭! 을 기억한다. 동네 한 바퀴를 조건 없이 달려준 순진한 땀을 생각한다. 강남역에서 길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준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를 하면 괜찮다고 자리를 뜬다. 남편은 여김 없이 전단지를 받는다. 호의의 씨앗이 누군가에게는 싹이 되기를 기대하며, 그래도 심을 수 있는 씨앗을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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