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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y 29. 2021

TMI의 쓸모

어느새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결혼선물로 핸드크림을 보내고 있었다.


TMI의 쓸모


‘카카오톡 선물이 결제되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결혼선물로 핸드크림을 보내고 있었다. 선물의 대상은 나와 함께 일하던 거래처 사람이다. 그녀가 위시리스트에 핸드크림을 담아놓은 것을 보고, 선물을 하게 되었다. 축의금을 보내기에는 가깝진 않았지만, 결혼을 축하해주는 마음은 표현하고 싶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나는 그저 업무로만 얽힌 사이였다. 우리의 관계가 바뀐 건 나의 라섹수술 이야기부터였다. 그녀와 나는 라섹 수술을 한 병원을 카톡으로 공유하고 나서, 급격히 친근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서로 일하기도 더 수월해졌다.  


이전까지 업무를 할 때 나는 굉장히 딱딱하고, 사무적인 이야기만 했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어색했다. 내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거나, 갑자기 남자 친구라든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왜 이래’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선 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내 말투도 딱딱했다. 


‘이 문서 처리해주세요~ / 이 서류 확인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정중하기는 해도 사무 성만 담은 말투로 늘 일을 했다. 그리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업무적으로 사이가 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회사에 일 잘하는 동료를 보니, 거래처나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 늘 친절하게 인사와, 사적인 안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며 하는 모습을 보았다. 미팅을 할 때 그는 파트너사의 과장이 이어폰 케이스가 바뀐 것도 알아보았다. 


“와 그 케이스 새로 사신 거네요 예쁘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신기했는데, 그래도 그런 농담을 하니 미팅 분위기가 더 밝아지고 즐거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농담이나 여유가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력이 오래되고,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로 나도 파트너 사 사람들과 간단한 농담도 하고, 안부도 물으며 이야기를 했다.


선물을 한 거래처 사람도 그런 케이스였다. 휴가를 쓰는데, ‘아 어디 놀러 가시나 봐요?’라고 말한 말에 라섹수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 저도 관심 있는데’라고 이야기가 이어지며, ‘나중에는 수술하고 좋으면 그 병원 추천해드릴게요 할인받을 수 있을 거예요.’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 라섹으로 이어진 기분이었다. 


만난 적도 없지만 나는 그녀의 결혼 휴가 소식을 듣고 간단한 기프티콘으로 선물을 주었고, 내가 퇴사할 때 그녀도 케이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그만큼 서로 일도 더 원활하게 서로 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티엠아이를 좀 더 잘 활용했다. 회사를 마친 후 요가를 갔는데,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운동복 상의만 2벌이 있었다. 흐억, 바쁘게 챙기다가. 상의만 두벌을 챙긴 것이었다. 집에 가야 하나?라고 생각하다가, 요가센터 카운터 주변을 서성거렸다. 레깅스를 판매하고 있어 가격을 보니 5만 원이 넘었다. 내가 평소 입는 레깅스는 2만 원도 안 하는데.. 하루의 실수 때문에 사기에는 다소 큰 가격이었다. 가격표를 보다 선생님께 말을 걸었다. 


“선생님, 오늘 상의를 두벌 가지고 왔지 뭐예요.. (예전의 나 같았으면 쓸데없어서 안 할 말) 

레깅스를 사야 하나 고민인데 좀 비싸네요.” 


라고 머쓱한 듯 웃으면서 말하자 선생님이 밝게 말씀하셨다. 


“안 사셔도 돼요! 저희 1000원이면 대여해드려요”라고 천사같이 말했다. 선생님은 상체를 굽혀 쇼핑백 하나를 꺼내셨다. 형형색색의 레깅스들이 나왔다. 


“고객님 같은 분들이 은근히 많아요!” 


라면서 골라보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셨다. 숫기가 없었던 나는 옛날 같았으면 그런 말도 못 하고 모른 척 숨어서 집에 갔을 텐데. 상의만 두벌을 가져온 나의 실수와 레깅스를 살까 말까 고민이 된다는 내용 등을 말을 하자. 오히려 상황을 이해하고 대안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돈을 아낄 수 있었다. 


물론 자기 개발서의 협상책을 보면 현란한 말솜씨가 나오고,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협상의 대가인 김두한은 이미 요가복을 4달러에 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배짱이 없다. 대신, 그저 내 상황을 얘기할 용기가 겨우 생겼을 뿐이다. 그래도 그 용기를 사람들이 알아주고, 도와주려고 하는 거라는 걸 좀 더 알게 되었다.


원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지나치게 떠들 필요는 물론 없지만, TMI를 실천하고 나서부터는 조금 더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제는 나도 상대의 TMI를 듣고 나면, ‘왜 저래? 왜 저런 얘기를 해?’ 하는 생각보다. ‘그렇겠구나.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내 마음의 공간이 이전보다는 좀 더 넓어져서 그럴 수도 있다. 사사로운 TMI는 업무관계나 공적 관계에서도 친근해지고 다정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꼭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올라가면 향긋한 느낌을 주는 에이드 위의 로즈마리처럼 약간의 향긋함으로 관계에 환기를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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