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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Jun 13. 2021

안경과 렌즈 : 오랜 날 오랜 밤

오랜 날 오랜 밤 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안경과 렌즈 : 오랜 날 오랜 밤


“좀만 참으세요 차갑습니다.”


차가운 물이 벌려지도록 고정된 내 눈 위로 쏟아졌다. 정말 차가웠지만 참을 수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엄마와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수술은 10~15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이 짧은 시간을 위해 수만 번 고민했다. 작년에 라섹수술을 했다. 정말 오랜 날 오랜 밤 함께 한 그들. 약 20년간 함께한 안경과 렌즈와 이별했다. 


우리 집에서 안경을 쓰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내가 8살 즈음 우리 집에 고장 난 TV가 있었는데, 치워둔 TV를 내가 계속 봤다고 한다. 엄마가 어느 날 보니 애가 TV나 책을 볼 때도 점점 앞으로 가서 보더란다. 그래서 결국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안경을 쓰다 보니, 고등학교 때는 매우 두꺼운 안경을 쓰게 되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이 작아진 내 외모는 딱히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딱히 외모에 관심도 없었고, 이성에도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저 공부도 하고, 만화책을 좋아하던 조용하던 학생이었다. 지금 들어 생각해보면, 내가 외모에 관심이 없던 것이지만 안경을 쓰면서 그 부분을 일부 포기하며 지내왔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생이 되며 렌즈를 맞추었다.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하니 외모가 전보다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후 렌즈와 케미를 맞추면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저기요 휴지 받으세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버스 안에서 마스카라와 눈 화장이 번진 채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앞에 계신 분이 안쓰러웠는지 휴지를 건넸다. 실연이라도 당한 줄 알았겠지만, 하드렌즈가 눈동자 밑으로 내려오는 훌라 현상 때문에 아파서 눈물이 나오던 중이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이라 렌즈를 빼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렌즈를 길거리에서 급하게 빼다가 잃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몇십만 원이 깨지는 렌즈를 잃어버리면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렌즈가 눈동자 아래로 내려가거나 뭐라도 들어가서 아픈 날이면 사연 있는 사람이 되고는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후다닥 어느 건물이라도 들어가서 뽁뽁이 (하드렌즈를 빼는 것)로 렌즈를 뺀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하면 가장 좋지만 화장실이 없는 경우 어쩔 수 없다. 그러면 눈이 너무 시원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꼴에 대한 슬픔이 밀려온다.


“부기 씨 PT 해보세요”

“네 제가 준비한 발표는요.”


발표를 한참 하던 중 또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회사생활 초창기 인턴일 때 발표를 하던 시간이었다.


“저 죄송한데 잠깐만요, 눈이 아파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 가방 안에 있는 렌즈통을 챙겨 화장실로 간다. 중요한 발표인데 이놈의 렌즈를 원망하며 뽁뽁이로 익숙하게 오른눈의 렌즈를 빼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렌즈 세정제로 렌즈를 살살 주물러주며 씻는다. 세정 후에 다시 끼면 건조함이 덜해진다. 인공눈물을 넣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은 가져오지 않았다. 미끈한 거품들을 물로 헹구려고 왼손으로 화장실의 수도꼭지를 들어 올린다. 세찬 물결이 검지 손가락 위의 렌즈로 떨어진다. 그리고는 제어할 틈도 없이 손아래의 세면대 배수관으로 흘러가 버린다. “악!”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한쪽에 15만 원은 될 하드렌즈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부기 씨 오래 걸려요?”


사수의 목소리가 화장실까지 들린다. 동그랗게 튀어나와 있는 세면대의 뚜껑과 동그랗게 도넛처럼 생긴 배수관 테두리를 잠깐 응시해본다. 그 좁은 틈새로 손가락을 넣어 더듬더듬거려보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미끈거리고 기분 나쁜 물기뿐이다. 재촉하는 사수의 목소리를 따라 이제 나가야 한다. 렌즈를 잃고, 한쪽 시력이 없는 상태로.. 남은 발표를 마쳐야만 한다. 왜 미리 배수구를 눌러 뚜껑을 닫지 않았을까. 급하다고 해도 그랬으면 안 되었는데 울고 싶은 기분이지만 탓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뿐이다. 쓰린 속을 날숨으로 후욱 내리고, 발표를 하러 다시 바깥으로 나간다. 손에 묵직하게 잡히는 렌즈통을 자리에 먼저 놓고 발표를 마저 진행한다.


“이제 눈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렌즈가 아예 사라졌으니까요.)” 


한쪽 눈이 흐릿한 상태로 발표를 계속한다. 머릿속으로는 월급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본다.


두 가지 에피소드 말고도 안경과 렌즈가 내게 준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있다. 안경과 렌즈는, 너무나 잘 맞지만 가끔 행패를 부리는 사람처럼 나를 행복하게도 괴롭게도 했다. 안경이 없이는 목욕탕에서 엄마도 못 알아보기 때문에 꼭 써야만 한다. 아침에 일어나 더듬더듬 거리며 머리맡의 안경을 찾아 쓰면 세상이 뚜렷해진다. 원망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시력이라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보물을 준 안경과 렌즈에게 정말 고맙다. 지울 수 없이 소중한 기억들이다. 가끔 힘들게 했어도 그들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안경과 렌즈가 내가 원망하는 기억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싶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AKMU의 ‘오랜 날 오랜 밤’ 이 떠오른다. 그동안 고마웠던 그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로 작별 인사를 한다. 

오랜 날

오랜 밤 동안

정말 사랑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될 거라 생각하겠지만(과학이 발전했으니 이해해주렴..)


밉게 날 기억하지는 말아줄래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당신의 흔적이

지울 수 없이 소중해 (여러분들 덕분에 즐거운 추억이 많았습니다.)

-악동뮤지션 <오랜 날 오랜 밤 中>


이제는 머리맡을 더듬거리지 않아도 눈만 뜨면 시계가 잘 보인다. 아직도 거짓말 같다. 트루먼쇼처럼 누가 밤에 내 눈에 렌즈를 끼워놓고 간 건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 너무 기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기쁨마저 무뎌져 간다. 눈만 잘 보이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도 슬픈 일과 원망스러운 일은 매일 있다. 과학의 힘을 빌려 지금 맨눈으로 살고 있는 나날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안경잽이였던 오랜 날 오랜 밤을 잊지 말고 그들을 기억하며 좀 더 감사하고 친절해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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