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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Jul 11. 2021

침묵 : 말이 몸을 다듬고 있는 순간

너무 뾰족하게 튀어 나가지 않게, 아니면흐물 해져서흩어져버리지 않게

침묵 : 말이 몸을 다듬고 있는 순간

침묵 : 말이 몸을 다듬고 있는 순간


다 함께 언급하지 않고 있는 순간이 있다. 또는 다들 말을 고르고 있는 순간이 있다. 그런 시간은 알맞게 숙성한 침묵이 은근히 자리를 채운다. 대화의 상황 중 티키타카가 잘 되는 때는 쨍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바이올린 연주 같다. 반면 적절한 침묵이 섞인 대화는 묵직한 베이스의 울림 같다. 채도가 낮지만 묵직하고 부드러운 따스함이 있다. 침묵과 냉담은 다르고, 외면과 침묵은 다르다. 침묵의 밀도를 깨달은 뒤로 조용한 상황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눈썹 문신을 지나치게 짙게 하고 온 A가 있었다. 다들 문신을 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A도 자기 입으로 문신을 했다고 밝히지 않았다. 업무 때문에 자리로 온 옆 팀 대리님은 오자마자 A의 눈썹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 어! 뭐가 달라졌는데? 눈썹 엄청 진한데?’ 짓궂게 놀리자. A는 문신을 했다고 실토했다.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과장님은 “정말 굳이 말한다. 굳이 말해.”라고 핀잔을 줬다. 



나 같은 경우, 내가 A의 상황인 경우 스스로 이실직고하는 편이다. 남들 입에서 나오면 더 부끄럽다. 반면 스스로 변화가 있어도 먼저 말하지 않는 부끄럼쟁이들도 있다. 침묵을 깨면 친근감이 자리 잡을 수 있지만, 당혹감이 올 수 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부분들은 먼저 알은 체를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도 침묵이 유지되는 순간이 있다. 아마 그런 때에는 말이 제 몸을 다듬고 있을 것이다. 서로에게 너무나 뾰족하게 튀어 나가지 않게, 아니면 흐물 해져서 흩어져버리지 않도록. 알맞게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핑퐁과 논쟁이 오가는 회의도 좋지만, 심사숙고하고 있는 침묵도 우아하다. 나는 이전에는 침묵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해, 조용한 분위기를 잘 견뎌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저 침묵을 깨기 위한 말을 했을 때 공간을 흩트려 놓을 뿐, 힘을 지니지 못했다. 



아버지는 침묵을 잘하시는 분이었다. 가족들이 질문으로 공격을 퍼부을 때 아빠는 묵묵부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를 고요한 ‘고인돌’이라고 별명을 붙여 놀렸다. 그때는 아버지의 침묵이 참 답답했다. 마치 답을 정하지 못한 사람과도 같게 느껴졌다. 어쩔 땐 알맞지 못한 질문에 대한 시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 남편이 차를 힘들게 대려고 하자. 아버지는 내리라고 노크를 몇 번 한 뒤 차를 대신 주차해주셨다. 어떤 잔소리나, 훈계 없이 조용히 바라보고 알아채 다정함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아버지의 침묵이 말과 행동을 다듬고 있는 의미임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더 좋은 말을 주고 싶을 때, 상대방과의 관계를 곰곰이 고려할 때, 침묵이 찾아온다. 때로 침묵은 솔직함이라는 왈가닥의 친구를 제압하고 숙고의 시간으로 더 좋은 말과 행동을 찾아내 준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침묵은 더욱 여러 의미가 있다. 내가 의아한 행동을 했을 때 남편이 말없이 바라보는 침묵. 하지만 표정으로는 눈이 커지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등 그 침묵이 ‘당혹’을 표현한다는 걸 알고 있다. 또는 퇴근 후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모습의 침묵은 ‘수고했어’를 표현함을 알고 있다. 등 예전에는 이런 침묵을 참지 못해 캐물었었다. 엄마가 우리를 빤히 바라볼 때 자주 “왜”라고 물었다. 그러면 엄마는 “사랑해서”라고 말했다. 아무 말없이 바라만 보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깨뜨리고는 했다. 지금은 나도 침묵과 함께 가족들을 바라본다.  



옛날에 생각한 다정함은 요란한 거였다. 선물을 사다 주고, 칭찬을 퍼붓고, 시기적절한 리액션을 기분 좋게 하는 것. 물론 나는 그런 다정함에 대해서 감사한다. 밝고 통통 튀는 사랑스러운 다정함이다. 요즈음 생각하는 다정함은 이런 것이다.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은 하지 않는 것, 몰랐으면 하는 것은 몰라주는 것, 소리 내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 말을 앞세우기 전에 다듬으며 기다리는 것, 이런 조용한 다정함이 포함되어 있다. 다정함에도 다양한 결이 있고 각자의 줄 수 있는 배려는 다르다. 사려 깊은 침묵이 주는 다정함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이 있는 마음을 내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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