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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May 15. 2022

손절각 말고 익절각

맞지 않는 관계에서 ‘손절각’을 잡더라도 '익절각'이 될 수도 있다.


손절각 말고 익절각


“손절해 손절!” “이거 완전 손절각” 


이런 말이 주변에서 종종 들린다. 관계가 안 맞으면 잘라내라는 말이다. 어제는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이 사람 손절 많이 하네.” 책 속 저자는 사람들과 관계가 맞지 않을 때, 그들을 떠났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내용이었다. 당당함을 손절로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책이든 매스컴이든 요즘은 안 맞는 관계는 서로 내치라고 권유하고 있다. 


손절의 의미는 이렇다. “대를 끊을 자손이 없어짐” 음 근데 이건 우리가 일반 적으로 많이 쓰는 손절이라는 말의 뜻은 아니고. 주식 장에서  ‘앞으로 주가가 더욱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단기간에 가격 상승이 보이지 않는 경우 주식을 매입 가격 이하로 손해를 감수하고 파는 일’의 준말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2022년 1월 1일에 하나의 뜻이 더 등록되었는데 ‘손을 끊는다’는 의미로 사람 간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라고 경제용어인 ‘손절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친구관계나 인간관계를 손절한다는 건 여기서 비롯된 거겠지. 많이 쓰여서 그런지 새로 뜻이 등록되었다. 손절은 즉 관계든 주식이든 손해를 보고 헤어지는 관계다. 


쿨하게 손절하는 게 좋을까? 손절이라는 것을 쌍방 간에 ‘절교’처럼 일방이든 쌍방이든 ‘만나지 맙시다.’라고 선언한 것을 기준으로, 나는 손절을 해 본 적이 없다. (당한 적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친구관계로 남기 힘든 남녀관계는 빼고..) 


친구 한 명은 함께 공모전을 하다가 사이가 멀어졌다. 사소한 의견 차이인데 서로 다투었다. “나는 A” “그 사람은 B” 의 의견 차이였다. 공모전에 떨어졌는데 쌍방 탓을 했다. 그 뒤 서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몇 년 뒤 그 친구가 연락이 와서 전시를 가자는 제안을 했다. 함께 전시를 보고 밥을 먹었다. 친구는 전시 후 그때는 미안했다. 자신이 미숙했다.라고 사과했다. 이후 시간이 많이 흘러 이 글을 적고 있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정말 잘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


이외에 정신적으로 힘들게 한 지인들도 있다. 의견이 맞지 않는데 강요한다던가, 너무 부정적이라서 함께 할 때 기가 빨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손절’을 하지는 않았는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대단한 싸움이 없어도 그들이 일으키는 소란이나, 말에 에너지를 뺏긴다. 그런 사람들과는 서서히 거리를 둔다. 꼭 만나야 한다면 단체로 만나거나, 아니면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너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나름의 이유는 이렇다. 집에 스킨답서스를 키우는데 초반에는 힘들었다. 물을 적당히 줬다고 생각했는데 축 쳐 저서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주던 물을 이주에 한 번으로 줄였다. 기간을 줄여서 물을 적게 주니 줄기가 기분이 좋은 듯 쭉 뻗었다. 식물들은 다 달랐다. 몇몇 화분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봄에는 활짝 피고, 겨울이 되면 아무리 애써도 기운이 없다. 맞지 않는 친구와의 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내가 물을 받는 그릇이 작아서 지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지인이 여유가 없어서 충분한 빛을 쬐어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서로에게 알맞은 이야기와 행동을 할 수 있는 온도가 올 거다. 그래서 구태여 관계를 정의하며 삭제하려고 들 필요는 없다. 그저 잠깐 거리를 두고 볕을 기다린다. 


 익절이 되었던 관계도 있다. 치를 떨며 싫어했던 몇 번 나를 울린 회사 상사가 있다. 그가 먼저 회사를 그만두었고, 나도 그만두며 서로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 날 상사의 생일이라고 프로필에 알람이 떴다. 그때 ‘안 좋았던 추억도 참 많았지만 가르쳐 준 게 참 많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매너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상사에게서는 “내게 뭐 바랄 게 있어서 연락을 하나”라는 뾰족한 말로 답변이 왔다. 여하튼 축하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중에 그는 내게 스카우트 제의까지 했다. 하지만 일이 맞지 않아 생각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서로 회사생활에서 투닥투닥했었지만 그와의 관계가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로 헤어졌다고 느꼈다. 지금은 함께 일하지 않기에 자주 연락하지 않지만, 따지자면 서로 평가를 좋게 마무리하였으니 익절이 아닐까? 


이런 글을 쓰는 기반은 내가 크나큰 상처를 받은 적이 없어서 일 수 있다. 아니면 무던한 성격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정말 악독하고 악마 같은 사람은 ‘헤어짐’의 의사를 밝히고 헤어져야 한다. 가스 라이팅을 하거나 폭력적인 관계를 버티라고 이 글에서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런 건 열외 하고 일반적인 관계에 대한 상념이다.


서로 맞지 않는 관계에서 ‘손절각’을 잡더라도 언젠가 서로 플러스가 될 수 있는 ‘익절’을 기다릴 수 있다. 가식이 아니라 내 생각의 편협함을 알고, 좀 더 마음을 열어두자는 기다림의 의미다. 살아가며 생각이 바뀔 때도 많고, 사람이 바뀔 때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관계의 온도가 맞아지는 순간도 온다.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선명하고, 단순하지 않다. 떠올려보면 마음이 한 뼘 자라난 기억은 관계의 다채로움을 알고 익절 했던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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