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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Feb 06. 2021

술자리에서 친구가 '너 변했어'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 5년 차, 지금의 나는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친구가 '너 변했어'라고 말했다.


술자리에서 친구는 내가 변했다고 했다. 예전에는 좀 더 속 시원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몇 가지를 떠올렸다.  


 예전부터 뒤에서 흉보는 게 싫었다. 싫은 부분이 있으면 대놓고 말하자 주의였다. 대학교 시절 남자애들에게 어장을 치는 K의 행동이 눈에 보였다. K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는 남자 동기의 한탄을 들어주는 것도 고역이었다. K는 주로 남자들에게 애매모호한 표현을 했다. 길에서 주운 돌덩이 하나를 주더라도 “이거 딱 하나 남은 거야, 나한텐 소중하지만 너에게 줄게.”라는 식으로 말했다. 의미부여를 기가 막히게 해서, 상대방은 발에 차이는 돌덩이라도 좋아하며 받았다. 그러나 정작 K는 그 의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준 돌덩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자신은 준 사실을 까먹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은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였지만 포장만 허황될 뿐이었다. 여자 동기들만 모인 술자리에서 K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왜 이렇게 남자관계가 꼬일까. 그냥 친절하게 대한 건데, 

다 이성으로 안 봐 그냥 친구로서 배려를 하는 거잖아."


주변의 여자아이들은 “그래 그래. 왜 그렇게 다들 착각들을 하냐” “네가 예뻐서 그렇지 뭐.” 라며 K를 위로했다. 나는 그런 태도로는 아무것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 태도가 좀 여지를 준 것 같은데. 굳이 배려할 필요도 없고, 선을 그어.”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배려해준 건데. 나는 원래 여자애들한테도 애교가 많아. 그냥 이런 말투야”

“그래도 그 사람들이 너에게 호감을 가지는 걸 알면. 구태여 안 해줘도 될걸 해줄 필요는 없다는 거야.” 


다른 애들이 말렸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보면 얘가 엄청 잘못한 줄 알겠다.”

"아니야, 부기야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조심해야지. 내 탓은 아니라도."


내게 한탄하던 남자 동기는 K가 평소 어깨에 기대 오며 티가 나지 않는 스킨십도 했고, K의 자취집에도 놀러 가서 단둘이 술도 마시고 손끝이 닿는 스킨십도 살짝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고백을 하자. K는 미안하다면서 넌 정말 좋은 애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K가 그런 행동을 즐기는데, 말은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 같았다. 이후 불편했던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과도 점차 멀어졌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K가 차 버린 남자를 내가 좋아해서 저렇게 행동한 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소문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일일이 대응하는 모습이 더 이상해 보일것 같았다. 


 직장 생활 5년 차, 지금의 나는 물어보지 않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눈에 거슬리는 신입이 있다. 신입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일은 잘 받지 않았다. 회의시간에는 회사의 방침과 다른 자신만의 의견을 표출했다. 그리고 맡은 바 일에 대해서는 잘 책임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일의 마무리 여부와 상관없이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너무 많아서 못했다고 말했다. 신입을 대놓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때로 점심시간에 동료들에게 신입 흉을 봤다. 


"걔가 일을 못하건 말건 나랑은 상관없지, 근데 걔가 자료를 안 줘서 내가 해."

"걔랑 얘기 좀 해보면 어때?"

"내가 팀장도 아닌데 뭘 말해."


사람들도 나중에는 신입 얘기를 먼저 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게 개념이 없더라.’ ‘점심도 사람들이랑 같이 안 먹고 사회성이 없더라.’ 신입은 자연스레 무리와는 멀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퇴사를 했다. 회사와 본인이 맞지 않는다가 이유였다. 속 시원한 마음과 함께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하게 불만을 말하는 게 좋았을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흉은 보지 말았어야 했나. 내 탓은 아니지만 퇴사에 기여한 기분이 들었다.


 대놓고 말하는 대신, 험담을 하는 것, 조언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친구가 말하는 내가 변했다는 걸까? 그런가 보다. 나는 변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기조를 유지하려 한다. 대학생활의 뼈저린 경험을 통해 알았다. '조언'이나 '충고'는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남자애들의 인기로 괴롭다던 K도, 개인 주인자인 신입도, 그 모습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말로 하는 불만은 한탄하거나, 자랑하거나, 아니면 공감을 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진정 변화하고 싶지는 않을지 모른다. 나는 이제 누군가, “내가 이러저러한데 충고해줘.”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먼저 충고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 <사람의 특성>에 대해서는 조언을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업무에 대해서는 ‘표’를 이렇게 만들어 ‘그림’을 이렇게 짜 봐 라고 할 수 있지만, ‘태도’나 ‘성격’에 대해서는 점차 대놓고 상대방에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회생활, 결혼생활, 인간관계 전반에서 원하지 않는 충고를 해 주는 인간들이 많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얘기를 잘 안 했다. 듣다가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얘기하면 꽉 막혔다고 하고, 잘 안 들으면 영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최대한 공감하는 척만 했다.


그러나 정작 지혜가 필요한 일에 솔직히 말하고 조언을 구한 적도 있었다. 연말정산, 결혼을 하며 가족들에게 해야 하는 것, 먹으면 좋은 음식, 상사와 잘 지내는 법 등은 주변 사람들이 해주는 말이 도움이 되었다. 이런 지혜에 엄청난 감사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조언이나 충고를 너무 받으면 힘들지만 꿀과 같이 꼭 필요한 말도 많았다.


결론은 이렇다.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이다. 

1.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리고 누군가 원할 때 조언을 하자.

2. 나도 조언이 필요할 때, 그에 걸맞은 사람 또는 정말 나를 아끼는 이에게 조언을 구하자.

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번은 잘 안되었다. 충고는 해도 그때뿐이다. 그냥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게 빠르다. 


친구의 말이 맞다. 남에게 하는 말을 가리는 것은, 내가 변한 것이다. 잘 변했다고 생각한다. 변한다는 건 사리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삶을 분별하게 되면서 나는 '충고해 줄 수 있는 사람, 충고받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삶이 좀 더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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