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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Feb 20. 2021

계절이 주는 다정한 약속들

내가 사랑하는 계절의 추억들

 

계절이 주는 다정한 약속들


“1년 내내 여름으로 살기, 1년 내내 겨울로 살기 뭘 택할래?”


침대에 누워 평온하게 웹툰을 보다가 숨이 턱 막혔다. 주인공과 친구는 밸런스 게임이라며 이런 질문을 주제로 대화를 했다. 웹툰 속 주인공이 내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침대에 축 널브러져 손가락만 움직이다 갑자기 고뇌에 쌓였다. 나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여름은 쨍쨍한 태양이 일품이다. 태양을 투영한 듯 온 사방을 맑게 만드는 초록빛의 영롱한 풀들과, 말을 잃게 만드는 하늘이 좋다. 더워서 헐레벌떡 들어가면 인류의 보물 에어컨이 반겨준다. 감질나게 시원한 선풍기와 부채가 있다. 혀에 닿아서 머리까지 쨍한 아이스크림의 질감이 좋고, 얼음이 또르륵 녹아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상쾌하다, 매콤한 비냉과 진한 물냉면은 시원하다. 긴 낮에는 할 일이 많다. 짧은 치마와 발을 시원하게 드러낼 수 있는 샌들을 신는다. 꾸역꾸역 차를 밀려서라도 바닷가에 간다. 수영장의 인공적인 물이든 바닷물이든 물에 들어가서 몸을 휘젓는다. 모래사장에 누워 수박을 먹으며 씨를 씹어 먹을까 뱉을까 고민한다. 치킨과 삼계탕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복날’이 있다. 모기들이 설치는 한강변에서 푸드트럭에서 산 닭꼬치를 맥주와 함께 먹는 기쁨이 있다. 나는 무서워 차마 보지 못하고 예고편과 캡처 짤만 보며 즐기는 공포영화가 있다. 설 명절, 추석만큼 사람들은 여름 휴가를 기다리며 일년을 보낸다.


행복한 만큼, 시련도 있다. 더우면 온 몸이 늘어진다. 늘어지며 몸에서 끈끈한 땀이 흘러나온다. 옷이 땀에 젖어 시선이 신경 쓰인다. 흘러내리는 땀처럼, 수많은 생명체들이 등장한다.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모기, 바퀴벌레, 매미 각종 벌레들은 여름에 그 존재감을 뽐낸다.


겨울은 찬바람과 눈이 좋다. 금세 녹아버리지만 보는 것만으로 설레는 눈이 내린다. 멋스러운 코트와 뚠뚠한 패딩으로 부풀어 오른 몸을 감쌀 수 있다. 추워서 집에 머물게 된다. 전기장판과 그 안에 들어가서 먹는 고구마와 귤이 달다. 집안의 온기를 느끼며 행복해진다. 연인들은 거리를 걸을 때 코트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잡는다. 주머니는 부풀어 올라 언덕처럼 동그래진다. 추운데 있다가 돌아오면 정전기가 생겨서 장난칠 구실이 된다. 크리스마스와 캐럴이 있다. 연말연시가 되어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아련함, 한 해가 다가오는 기다림이 있다. 망년회와 송년회로 그리운 이들을 보며 해를 정리한다. 스키장과 썰매장에는 사람들이 구르고 뛰논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먹는 어묵 국물과 소주 한잔은 이 사이로 닿는 시림도 뜨겁게 녹여준다. 붕어빵과 호빵을 먹기 위해 장갑 한쪽을 주머니에 넣는다. 


역시 행복한 만큼, 시련도 있다. 추우면 감기에 걸리고 몸이 힘들다. 눈은 즐겁지만 치울 생각을 하면 골치가 아프다. 꽁꽁 언 거리에서는 발끝에 힘을 주고 걸어야 한다. 눈 때문에 교통체증도 생긴다. 한파로 동파가 되면 간밤 수도꼭지를 틀지 못한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하게 된다. 


뚜렷한 명암이 있지만, 나는 겨울이 좋다. 두 계절의 장점은 모두 좋다. 하지만 여름의 단점은 겨울의 단점보다 크다. 여름이 되면 흐물흐물해지고, 모기와 바퀴벌레가 활개 쳐서 괴롭다. 나는 특히 집의 따스함이 좋기 때문에 따스히 쉴 수 있는 겨울이 좋다. 서로 간의 거리를 가까이하며 기댈 수 있는 겨울이 좋다. 겨울에는 내 생일도 있다. 생일에 눈이 내릴지를 기대하는 마음도 좋다.


겨울에 쌓은 지나간 추억들도 떠오른다. 대학시절 수업을 듣는중, 첫눈이 내렸고 수업을 땡땡이 쳤다. 당시에 만난 남자친구가 바깥에서 함께 첫눈을 맞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유치하게 “사랑하는 연인이 첫눈을 함께 맞으면 영원히 사랑한다.” 라는 미신을 입 밖에 내며 좋아했다. 

지금의 나는 첫눈이나 눈이 오면 창문가에 서서 고민한다. 내일 출근길은 괜찮을 것인가, 쌓인 눈을 치운다면 지금인가 아니면 내일 새벽인가. 이럴때면 만만한 남편에게 눈을 누가 치울 것 인가 물어본다. 체스에 지는 사람이 담당하기로 하고 체스판을 꺼내온다. 함께 나가서 눈을 맞자고할까 하다가. 그동안 함께 미신을 이뤄보려 했으나, 그저 스쳐 지나간 여러 인연들을 떠올린다. 손가락으로 창문 틀에 눈을 슥 찍어 남편의 뺨에 바른다. 눈을 함께 맞지 못해도, 함께 눈을 바른 추억을 하나 만든다. 

딱 하나의 계절로만 살아간다면 겨울을 골랐지만, 실제로는 고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풍부한 사계절은 옷을 많이 사게 하지만 다채로운 행복감을 준다. 한 살 한 살 쌓이며 계절에 대한 단상은 변한다. 그래도 지키고 싶은 약속들이 계절을 맞는 마음을 다정하게 한다. 기다려지는 여름의 바캉스와, 눈 쌓인 길을 걷는 추억들. 첫 눈을 함께 맞은 이와 영원한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시한 미신들을 믿으며 계절을 만끽할 핑계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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