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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Feb 17. 2021

다이어리 : 다정하고자 다짐하기

그때를 펼치면 연애와 이별의 대서사시, 노동과 향락의 기록이 펼쳐진다.


다이어리 : 다정하고자 다짐하기


20살이 되던 해 다이어리를 샀다. 싸이월드에도 적지 못하는 단어들을 다이어리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20살에는 내일 뭘 할지 적기보다. 무엇을 했는지 적으며 한 장 한 장을 채워갔다. 하루마다 했던 일을 적고 형광펜으로 진하게 칠하거나 스티커를 사서 붙였다. 그 나이에 다이어리를 적던 나는 매일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다짐을 꾹꾹 눌러가며 내일을 목표하지 않아도, 밀려오는 사건들이 많아 일상 속 이벤트가 가득했다. 그때의 다이어리를 펼쳐보면 거기에는 <연애와 이별의 대서사시>, <노동과 향락의 기록>, <치밀한 성실함보다는 치열한 벼락치기로 학점 줍줍> 등의 여러 서사가 있다. 한 사람의 삶이라고 보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의 집합체. 그럴 때 다이어리를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할 일이 많을 때는 지난 다이어리는 보지 말기로 한다. 그러나 대청소의 시간에 지난 다이어리를 펼쳐 들게 되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 떠오르고, 이제는 연락이 소원해진 지난 친구의 이름도 보인다. 그런 이름들을 보면 다시 붙잡고 싶은 인연도 아쉬워지고, 미처 하지 못한 말들도 입안에 맴돈다. 카톡을 남겨볼까 생각하다가. 이제와 이어 보아도, 다른 색의 천을 덧댄 옷처럼 해괴한 모양새로 남을 것을 알기에 주저한다. 그때 당시의 다짐과 희로애락도 보인다. 지금과 많이 다른 것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과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말들도 있다. “현재에 집중하자” “나에게 화내지 말고, 나에게 관대하자.” “어중간하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자.” 몇 년 전의 다이어리에도 적힌 말들은, 2021년을 살고 있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쓴 것 같다. 


 다이어리를 쓴지도 거의 10년이 넘는다. 그동안 다이어리를 사는 원칙과 쓰는 원칙이 생겼다. 12월에는 다이어리를 사는데, 월간 달력 뒤에 바로 주간 계획이 붙어있는 다이어리를 산다. 월간이 1월부터 12월까지 쭉 늘어져 있으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디자인이 예쁜 다이어리가 좋았다. 지금은 심플한 것을 선호한다. 가죽이나 양장본같이 겉표지가 딱딱한 것이 좋다. 아니면 커버가 한번 더 씌워져 있어야 헤지지 않고 오래간다. 이외에도 자잘한 나만의 법칙이 생겼다. 쓸 때도 원칙이 있다. 약속은 ‘샤프’나 ‘연필’로 표기하기, 기대한다고 볼펜으로 진하게 칠했다가. 연기되거나 변경되면 화이트로 슬프게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즐거운 일들을 다이어리에 꾹꾹 써내려 가며 행복감을 느꼈다. 지금은 다이어리에 지난 일들보다는 앞으로의 일과 계획을 많이 적는다. 특히 한 해가 시작될 때는 올해의 목표를 꼭 적는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10개도 넘게 적었다. 그러나 한 해를 돌아보면 평균 2-3개 밖에 이루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 이제는 다이어리 쓰기 경력직이니 목표를 3개 정도로 현명하고 안일하게 조정한다. 벌써 설이 지난 21년, 이 글을 쓰며 올해의 목표를 다시 펼쳐본다.


매년의 다이어리를 보며, 내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작은 것이라도 이뤄보려고 움찔거린 지난날을 보면 대견스럽다. 나의 ‘쓰기’가 진정한 ‘쓰임’으로 갈 날을 소망하며, 잊고 싶지 않은 날과, 기다리는 날이 담긴 빨간색 다이어리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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