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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Oct 16. 2020

그 사람 이후.

 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무성의한 모습이 방송화면에 비치자 그 멤버들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 당사자 중 한 명은 어린 시절부터 예쁜 외모로 인해 아역을 도맡아 왔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이 우쭈쭈해주니 눈에 뵈는 게 없다, 라는 식의 비난들이 일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공연업계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에게 늘상 '썰'이라며 듣는 말. "걔 진짜 싸가지 없대."


"관종"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던 그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아이돌을 그만 뒀다. 그간 무성의하게 무대를 하던 모습들 때문에 팬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몇 년 뒤 활동이 뜸하던 그는 인스타로 복귀를 알렸다. 화제의 연속이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설리가 세상을 떠난 날, 우리 모두가 설리를 비판했던, 혼내려 했던 이 일련의 과거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단지 '악플'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과연 그 뿐만인가. '대중'을 이루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비극의 책임을 악플을 남긴 소수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 지. 


설리 휘핑크림은 연일 화제였다. 몇 초 내외의 짧은 동영상 안에서 설리는 휘핑크림을 머금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본다. 성행위를 연상시킨다며 사람들은 설리의 '의중을 짐작'하고 그 해석은 마치 사실처럼 떠받들여졌다. 그들의 주된 비판 근거는 '그녀가 아이돌'이라는 것이었다.  작은 언행이 청소년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는 공인이자 아이돌이기 때문에 설리의 행동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때도 물론 왜이리 유난이냐는 말이 많았다.) 이런 유난스런 반응을 의구심이 든다면 세가지 이유에서다. 일단 휘핑크림을 머금은 행위가 어디가 잘못되었느냐는 말이다. 그 행위를 '외설'로 만든 것은 설리가 아니라 소수 대중, 언론이었다. 별 거 아닌 사물을 보고 야한 생각을 하는 친구에게 "네 머리에는 똥만 찼구나"라고 말하곤 하는데 왜 그때 우리는 그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지 못했을까. 왜 설리가 머리에 똥만 찬 사람이 되어야 했을까. 두번째 이유는 작은 언행이 청소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이돌이라면 아이돌의 행동반경은 어디까지 제약되어야 하는가. 설리의 행동은 위법도 없었을 뿐더러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적도 없다. 해당 기준은 참으로 모호하다.  '노브라', '연인과 입맞춤을 하는 사진'이 어떻게 청소년 성숙에 악영향을 미치는가. 그것들이 표방하는 가치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사회적 편견만 있었을 뿐이다.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설리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설리는 일찌감치 아이돌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설리가 떠난 후 문득 들었던 생각이 이거였다. '설리는 언젠가 아이돌을 관두었다'. 아이돌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들은 10대에 연습생시절을 거쳐 데뷔한다. 연습생 시절에도 목표를 향한 무한 경쟁에 내몰린다. 그 목표는 데뷔일 것이다. 데뷔 이후에는 물론 더 이름을 알리는 것이 목표일테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곧 대중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모가 되었든, 노래실력이 되었든, 춤실력이 되었든, 거기다 인성까지. 하나라도 모자라면 실격이다. 아이돌 산업은 철저히 이러한 시장수요에 기반한 기획에 굴러간다.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인 어린 아이들의 몸과 정신에 아이돌 산업의 이런 생리가 각인된다. 인정받으면 끝인가. 아니다. 인기를 유지해야 한다. 아이돌의 말 하나하나도, 행동 하나하나에도 대중의 비난이 장전된다. 연예인의 삶이 늘 프레임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지만 아이돌은 더한게 현실이다. 설리는 그 틀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설리가 용기가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이돌 가수로서의 인기를 저버린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다. 다만 지금에 와서 한가지 더 드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설리는 그런 삶을 견디는 게 힘들었을 정도로 '불안한 상태'였을 거라는 것. 대중의 이목을 한눈에 받으면서도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을 수 있다는 것. 설리는 분명 지쳐 있었다. 


 종현, 설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아이돌 가수의 '정신질환'과 이를 심화시키는 아이돌 산업의 불편한 생리가 비로소 사회적인 논의의 장으로 들어왔다. 대중의 마음에 드는 아이돌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산업과 이 사회에서 우리는 역으로 그렇게 만들어지는 '개인'의 입장을 고려해 본 적이 없다. 대중은 만족을 얻고, 끊임없이 아이돌가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의 SOS조차 제 목소리로 낼 수 없었다. 


 설리의 1주기가 될 때까지, 늘 머릿 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은 이거였다. "설리가 결국 죽었구나."(나는 그 선택의 이유를 안다는 말이 아니다.) 스스로 지독한 외로움에,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텐데도 그는 항상 맨몸으로 무언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삶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를 지탱하는 것은 어떠한 믿음이었을까. 조금씩 세상이 그녀가 말하는 대로 바뀌는 듯했다. 설리의 언어가 용인되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그 용감한 설리의 죽음 음이 변화의 전환점이 되고야 말았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행복했던 나였는데 그녀는 행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죄책감이 들도록 한다. 대중으로서 그라는 사람을 억압했던 어떤 시스템의 유지에 일조했다는, 개인으로서 그 내면적 고통의 존재를 알아봐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그녀를 잊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언어를 발화함으로써, 그 죄책감을 씻어낼 수밖에. 진리가 세상에서 최고로 멋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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