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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Nov 18. 2020

무제

정답을 대신 건네주세요.

언젠가부터 말을 하는 게 힘들어졌다. 학교에서 하는 게 매번 사람들 만나고, 같이 회의하고, 프로젝트 진행하고 보고서 쓰는 일인데 언젠가부터 말이 꼬인다. 과제 얘기, 남 얘기 할때는 말이 술술 잘도 나온다. 하지만 내 얘기 할 때, 내 감정을 이야기할 때 나는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 


정신과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호흡이 가파르게 뛰거나 불아증세가 너무 심해지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시험 공부를 할 때 늘 집중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해 아쉬운 결과를 받는 이 사이클 속에 깊어지는 자괴감도 나름 아픈 거 아닌가. 내 자가진단표로 드러난 상태는 '너무도 정상'이었다. 정상인의 입장으로 정신과 진료실을 찾아설 때 남은 임무는 단 하나. 설명해야 한다. 기존 의학진단서로는 드러낼 수 없는 내 비정상적인 면을. "선생님 저 아픈 사람입니다."


성인 ADHD라는 병에 대해 대충 알고 간 지라 그 쪽 카테고리로 나를 밀어 넣어보려 했다. 선생님 저는 집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집 안에서는 계속 걸어다녀야 하고 책 한 권을 읽지 못합니다. (지금 이렇게 앉아서 노트북에 글은 잘 씁니다만) 다른 생각이 너무 많이 침투해요. 그리고 늘 결과에 실망하고 자괴감에 들지요. 어떡하죠. 선생님은 성인 ADHD라면 대학교도 못 갔을 것이라고 '너의 상태는 정상이다'라고 계속 암시하셨다. 선생님이 물으셨다. "약 처방을 원하는 거에요? 그거 가지고 약팔이들이 너무 그래서..." 병에 대해서도 알았고, 약에 대해서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그 약처방에 대해 듣게 되니 덜컥 겁이 났다. 더군다나 '약팔이'는 되기는 싫다는 의사 쌤이 앞에 계신다. "그건 아니구요..." 


거기서부터 말이 완전히 꼬였다. 약을 받는다기 보다는요. 선생님. 뭔가 제 상태가... 말을 잃고 말았다. 솔직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솔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인지. 약처방을 원하기는 했다. 그런데 선생님 사실 저도 (제가 여기 왜 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하면 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아프다는 사실을 호소하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길래. 선생님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해요. 그 성격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횡설수설을 멈추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한 2주 전의 일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왠지 떳떳하지 못한 느낌을 가진 채 그럼에도 마음 속 한 켠 작은 무언가가 해소되어 버린 듯한. 그 이후로도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말할 때, 내 생각을 전달할 때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그 진료실 안에서 내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솔직하지 못함'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 솔직하지 못한 것은 맞는데, 나는 왜 굳이 솔직하지 못한 어눌함을 드러냈을까. 누군가가 어눌함을 보일 때 어떤 사람은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의지가 되고자 그의 어눌함을 교정해주고자 한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언어를 교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정, 더 나아가 그 사람이 나에게 '정답'을 대신 건네주기를.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 지 당신이 해석해주기를.


때로는 장황하고, 거칠게, 그렇게라도 브런치라는 공간에 글을 써내려 감에도 여전히 이러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먼저 조금이나마 솔직해질 수 있음에 여전히 내 사람됨됨이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또는 글을 읽고 있을 익명의 누군가가, 글을 써내려가는 나 스스로가, 미래에 이 글을 다시 읽을 내가 그 정답을 줄 수 있을 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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