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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Nov 24. 2020

11/10

투쟁을 하지 못하는데, 투정도 못한다. 차라리 투쟁이라도 열심히 했다면 나는 투정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투정할 권리를 주지도 않으면서 투쟁하지 못하는 용기를 타박하는 이 세상에 더 투정해보고 싶다.


 “너는 저런 사안에 관심이 있어?” 친한 친구 하나가 교내 청소 하청업체 직원 시위를 가리키며 물어왔다. 건조한 긍정의 대답을 건네며 나에게는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저들에 공감하지만 저들과 투쟁을 같이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다른 하나는 나는 왜 굳이 저들의 이야기, 소위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하는. 


 관심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관심을 갖고 싶어서 가지게 되었다기보다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서다. 다문화 이민자, 육체노동자, 학력자본의 부재라는 그들의 서사는 또한 온전히 내 가족, 내 부모님의 이야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서 “더 편한 삶”을 당신들과 나에게, 후세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은 자연히 나의 몫이 되었다. 그 작업이 참 힘들기도 했고, 나에 대한 투자가 온전히 당신들의 육체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의 서사가 ‘흙수저, 동수저’라는 시대적 유행어로 이름지어졌을 때 나는 그들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 것을 넘어 그들과 함께 투쟁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다. 정확히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핏대 세우며 발언을 할 만큼의 용의도, 용기도 없다. 용기가 없는 것은 저들과 발을 맞추면 나는 내 발걸음의 속도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 같아서다. 더 나은 내 삶, 미래를 위해서라면 운동에 몰두하기보다 나는 교과서를 더 읽고, 영어 공부에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할 거 같다. (소외된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 그 개인적인 이유가 여기서는 핑계가 된다.)또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은 하지만, 세상에 화를 품지는 못한 나의 부족한 용의가 드러날까봐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게 도리어 상처가 될까봐 용기가 없다. 적당한 시민운동, 활동이 스펙이 되기도 하는 이 사회에서 나는 어째 영악한 대학생이 될 용기가 들지 않는다. 


 나의 연대는 이렇게 애매하다. 그럴 듯한 개인적 이유는 내 관심을 투쟁으로 이끄는 촉매제가 되지는 못하고, 어째 그 투쟁 혹은 활동이라는 단어가 두렵다. 그러나 언젠가 나의 연대가 애매할 ‘수 있는’ 이유를 맞닥뜨렸다. 내 정체성 자체가 애매하다. 같은 학교 학생들의 조국 전 법무장관의 사퇴 시위를 마주했을 때였다. 가진 자의 편법으로 자신의 피, 땀, 눈물이 부정당할 수도 있는 사회에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정의사회’, ‘검찰개혁’을 외치며 임명된 법무장관이 뒤에서는 그런 편법을 부렸다면 그 배신감은 상당하다. 한 편으로는 서연고 진학이 온전히 자신의 노력이라는, 자신들마저도 ‘가진 부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그 ‘능력주의’의 신화에 매몰된 내 동년배들이 야속했다. “너희들 중 3분의 1은 국제학교를 다니고, 부모님이 채운 책장에서 지적 성장을 수월하게 이루지 않았니” 그들에 동조하지만, 나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시위하는 이 야속한 청년들을 비난하는 기사들이 쏟아지자 나는 비로소 내 애매한 정체성을 실감했다. 각 대학교 재학생들의 소득분위를 통계로 줄 세우며, 언론은 이 이기적인 청년들을 혼내기에 급급했다. 이 청년들은 태생부터, 미래에도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는 비난들. 그 기사를 보며 나는 SNS에 투정을 내보려다가 접었다. 문화자본, 교육자본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 교육자본을 얻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고, 이 학교에 다니면서도 그 불평등을 얼마나 체감해 왔는지. 그러나 그 글이 어떻게 오독될지, 어떤 비난을 받게 될지 명확한 상황에서 또 용기가 안 났다. 너는 어차피 연세대학교 학생이라는 비난을 받을 게 뻔했다. 비진학 청년, 소위 지방대학생에 비해 내 손에는 이미 기득권이 쥐어져 있었다. 모두가 정체성 분류에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에서 내 기득권 외의 면을 봐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말을 잃은 느낌이었다.


 여하튼 투쟁을 하지 못하는데, 투정도 못한다. 차라리 투쟁이라도 열심히 했다면 나는 투정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투정할 권리를 주지도 않으면서 투쟁하지 못하는 용기를 타박하는 이 세상에 더 투정해보고 싶다. 시위하는 청년들을 혼내는데 혈안이 된 언론들은 같은 대학교 내 재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배경들, 어떤 학생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봐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진학 청년에게 관심을 주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또 투쟁을 하기 위해 내가 무언가를 포기할 때 그렇게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답이 없는 것을 알지만, 이것마저 청년의 몫으로 넘겨버리면, ‘살과 살을 넘는’ 연대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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