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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혜BaekJi Dec 25. 2019

여성서사

강한 애 여자애로는 충분하지 않다

할리우드 여성영화인들의 고발로 시작된 미투은동은 거물급 남성영화인들의 그간 성폭력 실태를 낱낱이 드러냈고 이들을 완전히 퇴출하기에 이르렀다. 2017년 말부터 시작한 미투의 영향 아래 2018 골든글로브 영화제 사회자 세스 마이어스의 첫마디는 “Ladies and remaining gentlemen”이 되었다. 여성영화인은 자신들이 받아 온 차별을 얘기했고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더 가질 수 있었다.


미국의 미투운동은 알다시피 한국 미투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시작하여 연극, 문학, 영화계 내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실태가 밝혀졌다. 사실 2016년 말부터 현장의 몇몇 여성영화인들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렇게 화제가 되지 않았었다. 막 영화를 하겠다는 치기어린 꿈을 접은 이후여서 그 기사를 접했을 때 “역시 여성이 남성이 지배적인 현장에서 꿈을 가진다는 것은 한계가 있구나”라는 어른들의 꼰대발언이 비로소 현실로 다가오는 듯 싶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영화를 직업으로 정한 나의 친구들의 현실과 미래가 우려되기도 했다. 그 현실을 다시 1년이 지난 후 한 친구의 증언으로 접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을 왜 재능이 많은 내 친구들이 그런 것 때문에 우울증에까지 시잘려야 하나라는 분노를 느꼈다.


미투운동은 그 이후의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가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영화, 방송서사의 변화일 것이다. 여성영화인, 대중의 분노를 인식한 것인지 할리우드는 영화 서사에 “여성의 활약”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가장 그런 시도가 돋보인 것은 디즈니의 리메이크 시리즈와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이다.


90년대 자사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디즈니는 대개 순종적이거나 남자 주인공의 구원을 기다리는 여성주인공의 모습을 완전히 비꼬와 새로운 여성주인공을 연출한다. “주체적인 여성은 남성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이 모토일 것이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나, 모두가 우려한 토이스토리 4에서 보  핍이 우디무리를 이끌어 위기를 헤쳐나가고 앞으로의 모험 또한 주도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 그 예이다. 마블에서는 캡틴 마블과 같은 캐릭터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 남성의 이미지가 편견에 가둬진 채 어린이, 청소년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미디어에 드러난다는 것은 그 학습효과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때에는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비련의 여주인공” 등이 워낙에 사회 내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었다. 영화를 하도 좋아해서 하루에도 영화배우, 감독, 영화들을 찾아보던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좋아했던 소위 명작 영화들 속에 여성캐릭터는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얼마나 플롯에서 소외되어 있는지. 왜 플롯을 구성할 때 우선적으로 남성 주인공이 떠오르는지. 이제보니 여성감독이 얼마나 드문지. 지금껏 이러한 것들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아 번 어린 내가 어리석어 보였다. 아직 서툴더라도 이러한 경향을 인지하고 그를 변화하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적어도 나의 이후 세대들은 앞으로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테니.


하지만 그저 강하고 쎈 여자애로 만족할 수 있을까. 남성보다, 남성만큼 강하고 현명한 여성캐릭터를 내세우기 시작했으니 이제 된걸까?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이제부터 시작인 거다. 서사를 다루는 드라마는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representation이라고 생각한다. 기차나 달 착륙 등이 최초 영화의 주제였으나 이후로는 역사 속 영웅, 더 평범한 인간들로. 미디어는 “더 평범한 인간들”을 표현하는 행로를 택했다. 제 아무리 똑같은 인물이라도 감독 작가가 그 인물의 면모를 얼마나 다양하고 깊이있게 들어내냐(characterization)에 따라 작품은 제각각의 독창성을 가진다.


여성캐릭터의 representation, characterization에 더 많은 수고가 들여져야 한다. 강하고 쎈 여자애는 어찌보면 가장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다. 그래 여성이 억압적인 현실에서 여성이 조금 더 자신 있고, 능력도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여성말이다. 그러나 이런 캐릭터가 더 많은 여성을 대변할 수 있지는 않다. 인간은 제각기 다른 정체성, 배경을 가지고 이에 따라 삶이 상이해질 수 있다. 여성도 그러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처이 대통령후보자로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올라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 내 모든 여성의 삶이 그만큼 나아졌다고 볼 수 있을까. 힐러리 클린턴은 여성이지만 백인이며, 중산층에 속하였다. 백인이 아니며, 중산층에도 속하지 못하는 여성이 힐러리 만큼의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변호사 킴벌리 크렌셔(Kimberly Crenshaw)는 인터섹셔널리티(Intersectionality)로 이개념을 정립했다. 인종, 성적 정체성, 성별, 경제적 배경 등 여러 요소에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할 수 있는데, 대개는 여러 겹의 차별이 개인에게 덧씌워진다는 것이다. 같은 여성이라 하더라도 흑인 여성이 받는 사회적 차별은 백인 여성의 것과 다를 것이다.


똑같이 미디어의 represenatation이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이부분이다. 세상에는 힐러리 클린턴같은 여성만, 자스민 ‘공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 이후 “김지영만큼 살지도 못하고, 대학도 못간 여성의 이야기는 배제되어 있다”라는 비판도 이러한 현실에 근거한다.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플롯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 차별은 늘 (여자가 뭘하겠어)라는 날 선 언어로 드러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차별은 언어가 아니더라도 사회 깊은 곳, 인식 속에 녹아 있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행동양식, 생활, 인생을 만든다. 마이클 커닝햄(Michael Cunningham)의 소설 디 아워(The Hours)가 전하려는 바 전부가 이건 아니지만 결혼-육아로 이어지는 당연한듯한 인간의 인생 내 “제도”에 이유 모를 우울감을 느끼고 이를 벗어나는 인물을 보여주는 식의 서술 방식이 가장 대표적일 수 있겠다. 가사노동하는 여성, 이상한 우울감 식의 서사는 사실 The Revolt of Mother 등의 과거 영문학작품에서도 보여온 바가 있다. 김지영의 서사가 이와 비슷한데, 이들 서사가 보이려는 바는 고구마같은 현실, (강하지 않은) 보통 여성의 삶이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보통이라 생각되는” 여성이 아닌 여성의 삶이다. 넬라 랄슨(Nella Larsen)의 패싱(Passing)은 흑인 여성의 삶을 다룬 포스트모던 소설로, 인종으로서, 성별로서 사회의 억압에 노출된 인물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도를 마주하면 단연 반가울 수밖에 없다. 드라마 동백꽃 필무렵을 봤을 때 느낀 흥분은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주인공 여성의 설정은 이전 보통 서사에서는 딱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으나 이 드라마는 완전히 이 구도를 뒤집는다. 그녀의 설정을 통해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 내 여성에 대한 사회의 차별을 해부한다.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도 이전 서사와는 사뭇 다르다. 피해자-직업여성이면 사람들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위험한 곳에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정면에서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현실을, 살회의 보호를 받지못하는 여성이 마주하는 이 답답한 현실을 고발한다. 변호사와 같은 강한 여성도 이 제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고발한다. 잘 만들어진 서사가 이만큼의 재미, 화제성을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행복하다.


대중이 변했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의미도 여러 기사들을 통해 분석될 수 있었다. 대중이 변하는 한 미디어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변해야 한다. 변한 미디어는 다시 사회를 인식적 측면에서 재구성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으로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나는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여성서사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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