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맛
1. <난장판이 매력이야>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학부시절 배운 영문학 작품 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다. 영문과 수업에서는 사실 고리타분한 텍스트를 자주 보기 일쑤다. 그런데 이 작품은 소위 “유잼”에 속하긴 했다. 당장 배경이 80년대 미국이었다. 가까웠다. 또 인물들은 어쩌면 제정신인 이들이 한명도 없었고 이들이 토해내는 대사들이 어찌나 노골적이었는지. 비속어가 남발했지만 코믹한 맛이 있었다.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극 자체가 지니고 있는 “혼란스러운 엉킴”이었다. 미국사회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기본 뼈대인 이 희곡에는 인종, 종교, 섹슈얼리티, 에이즈, 정상성 등 여러가지 소재들이 엉켜있다. 그러다보니 읽는 사람은 도대체 이거 주제가 뭔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어딘가 짠한 인물들의 감정선만 따라가도, 무대 위의 온갖 난장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으므로
그렇다 엔인아의 매력은 <난장판, 혼란> 그 자체다.
2.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여전하다>
지가 필요할 때만 발휘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내 옆에 앉은 관객과 몇마디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이 연극을 알고 왔냐부터 이거 어떻냐까지. 엔인아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미국사회에 대한 이해나 작품의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라면 그에게는 두서없는 헛소리같은 작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로서 글로벌 보편성이 부족한 이 작품은 아니나 다를까 그 극장의 50%는 차지할 유형의 관객으로부터 체면구기는 평을 들었다.
“재미가 없지는 않은데, 특별히 재밌지도 않아요. 어렵구..”
그녀는 어색한 대사와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원인으로 꼽았다. 정확한 분석이다.
전자의 경우 국내 초연에 쓰인 번역 각본탓이 크다. 영어 표현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번역해서 원작에 충실하려 한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말맛이 아쉬웠다. (나도 이부분은 좀 실망스러웠다) 한국관객 이밪ㅇ에서 인물들의 대사는 딱딱하고 어색하다. 대부분이 문어체다. 분명히 배경은 80년대인데, 한국 관객에게는 거의 60년대 할리우드 더빙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개그포인트들이 몇가지 있었는데 전달이 잘 안되었다. 관객들이 가장 빵 터진 부분은 두서없이 자기 말만 10분동안 늘어놓은 루이스에게 흑인 루이즈가 “언제 제풀에 지쳐 말을 멈출까 했지”라고 비아냥댈때였다. 우리 언어의 관용표현이 쓰일 때 비로소 다수 관객의 웃음버튼이 눌린 것이다. 유머, 결국 말맛이다.
후자는 사실 국내 제작진도 어떻게 손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토니 쿠쉬너의 엔인아는 미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아주 깊이 흐르는 작품이다. 보편성보다 특정 사회문화의 특수성이 짙게 드러난다. 나야 수업에서 작품을 배웠으니까 작품의 배경이나 주제의식을 어느정도 이해하며 작품을 즐겼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열에 여덟은 당연히 저런 박한 평을 낼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엔인아가 미국사회에 대한 신랄한 통찰을 지녔고, 뛰어난 작품/예술성을 지녔다한들, 영미문화권을 넘어 관객에게 전달되면 금방 희석되는 가치들이다. 관객의 무지성을 탓하는 건 “이거 재밌는데 왜 니들이 몰라줘!!흥!”하며 떼쓰는 것과 다름없다. 분명 한국제작진들의 역량 부족도 있었고, 토니 쿠시너 원전이 전세계 관객에게 호소하는 보편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명의 관객이라도 그 자리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지 못한다면 90%는 창작자의 탓이다.
새삼 디즈니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한편으로 얼마나 대단한 지 생각했다. 높은 보편성으로 그 어떤 장벽을 넘어 개개인에게 호소하는데, 그 와중에도 자국 문화사회의 이미지 또한 열심히 주입한다. 통찰이 떨어지냐고 물으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요즘은 작품성도 높은 할리우드 스펙터클이 많다. 어릴때는 상업성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에 무조건 엔인아같은 작품들이 스파이더맨보다 위대하다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 보편성을 갖는 것이, 또 빼어나게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하기에, 상업성의 가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밸런스를 귀신처럼 맞투는 디즈니, 할리우드 이젠 너희를 인정한다…
3. <연출, 연기는 칭찬해>
어색하고 어려운 각본이 “재미없지는 않은데…”며 혹평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연기와 연출의 힘이 컸다. 전국향, 김세환 등 조의 어머니, 루이스를 연기한 이들의 연기가 특히 돋보였다. 텍스트 안의 인물의 맛을 정확히 재연하며 극에 잘 녹아든다. 배우 정경호는 개성있는 캐릭터를 맡았고 감초 역할을 재대로 한다.
한국연극무대에 비상착륙한 각본은 불균질했다. 그러나 무대는 매끄러운 편이었다. 4시간의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연출의 힘이다.
4.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냥>
수업에서 이 작품을 배울때는 작품을 그저 이해했다. 꾸역꾸역. 몇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의 상연을 보면서 나는 공감이란 걸 하게 되었고 감정이 고양됐다. 그간 내 삶에 쌓인 경험이나 감정들이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느낀 바들과 비슷한 점이 있었고, 나는 비로소 인물에 나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었다.
엔인아는 결국 맘 가는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정상성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미국사회에서 비정상적인 개인들은 부침을 겪는다. 사회적 정의나 도덕체계가 마음 속에 깊이 박혀 스스로의 욕망, 욕구를 억압한다. 그 억압으로 인해 마음의 균열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조와 루이스(프라이어의 애인)다. 조는 몰몬교인, 이성애자, 사회적 출세를 꿈꾸는 서기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동성애자로서의 욕구, 껍데기가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향한 욕망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위태롭다. 사회적 규율, 도덕과 통제할 수 없는 갈망의 경계에 놓여있는 그는 결국 구역질을 하고야 만다.
루이스는 동성애자로서 프라이어의 애인으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그는 이전의 삶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된다. “에이즈에 감염된 호모섹슈얼”인 애인과 같이 상다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위협이 될 지 알고,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프라이어를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고싶다. 그러나 혐오의 촉매와 같은 에이즈는 정상성에서 너무도 동떨어져 있고, 그 현실이 그에게 말한다. “헤어져야 해” 남성 애인을 만나도, 에이즈 걸린 애인까지는 감당할 수 없어, 그정도로 멀리 갈 수는 없어. 동시에 사랑하는 이를 배신해서는 안된다는, 감정의 규율이 그를 또 옥죈다. 사회적 혐오와 감정의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압박이 그를 옥죈다. 그는 이도저도 할 수 없고 그의 마음은 완전히 너덜해졌다. 시종일관 두서없이 현학적인 그러나 강한 주장문을 읊는 그는 분노하나 무기력한 개인의 모습을 담아낸다.
2막에서 이들이 부인, 애인과 갈등이 폭발할 때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왔다. 어쩐지 맘이 붙잡혀 있는 이들의 삶, 현재의 삶이 불안하고 외롭고 곧 무너질 것 같은데도 나는 내 맘이 가는대로 할 수 없다. 이 비슷한 상황을 나도 지난 시간동안 겪었다. 조금 더 마음가는대로 하기로 한 지금은 훨씬 자유로움을 느낀다. 계속 돌아가는 무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들에 나는 오늘만큼 공감한 적이 없었다
5. <천사가 원하는 것>
조의 허위에, 흔들리는 루이스에 의해 괴로운 것은 그 주변인들이다. 하퍼는 조의 위장생활에 고통받고, 프라이어는 사랑을 배신한 루이스에게 분노한다. 이 둘의 환각과 꿈은 이미 너덜해진 현실로부터의 도피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라이어는 그 환각에서 천사의 메신저로 점지된다. 제일 불쌍한 인물이 무너질대로 무너진 개인들의 삶, 부패한 사회(로이콘의 사법농단)를 심판하고 변화시킬 메신저가 된 것이다.
이 천사가 프라이어의 입을 통해 내릴 심판은 과연 무엇일까. part2를 보면 알겠다. 그래도 떡밥들을 모아보면 대강 예상은 가능하다.
위태로운 인물들을 보자. 그 원인은 조의 대사에서 비로소 암시된다.
“오늘이 월요일인 줄 알고 법원으로 출근했어요. 일요일이라 불이 다 꺼져있더라구요… 자유로웠어요. 이 정의라든지, 사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부재한 세상에서 산다는 건 얼마나 좋을까요”
인간의 삶에 경계를 짓는 정상성의 체계, 즉 도덕, 규범체계와 그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이 원인이다. 어쩐지 엔인아의 인물들은 기형적이다. 위장하는 조.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에이즈 감염 사실을 숨기는 동성애자 로이 콘. 하퍼와 프라이어. 이들의 삶은 견고한 사회적 규범이라는 쇠철을 중심에 두고 왜곡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질문을 제기한다. 캐케묵은 규범이나 전통이란 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오래전 과거의 미국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단일한 사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현재의 미국은 다양성의 사회다.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 등 개인은 너무 다른 카테고리에서 각자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 단일한 규범으로 삶을 규정하는 것은 이들의 삶을 왜곡하며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규범과 인간삶의 부조화가 이루는 난리판이 지금의 에이즈 미국이다. 작가는 묻는다. 인간들이 죽어야 하는가, 규범이 죽어야 하는가.
그 천사는 전통의, 규범의, 진리의 사망선고를 내릴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의 사상까지 갈 필요 없이, 인간의 역사는 결국 신이나 절대적 진리에서 인간과 진리의 해체로 진보한 것이 아니었나?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로의 이행은 결국 휴머니즘의 실현이었고, 페미니즘, 퀴어이론, 현대철학은 근대철학이 규정한 진리를 해체하느 작업을 하지 않나?(여긴 잘은 모르지만) 숨쉬지도 않는 진리나 정의라는 것들이 이저리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아이러니를 쿠시너는 포착했다. 그리고 선언한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토니 쿠시너의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신을 자처하며 정상성을 강요하는 종교, 규범, 사법체계에 대한 “요상한 인간들”의 유쾌한 펀치다. 천년 전 인간의 역사에서 보여진 인간의 지혜(신에게서 인간에게 힘을 넘겨준) 에이즈 미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에 “밀레니엄이 온다”라는 제목의 의도도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정상성의 이데올로기가 견고히 자리잡고 있다. 정상성의 사회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페미니즘 시위, 퀴어퍼레이드를 포함한 다양한 의견표명 등. 거대하진 않으나 꾸준한 부침과 진동을 겪는 한국사회에 엔인아는 꽤나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