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온 날, 엘렌의 넷째 진통 소식에 서둘러 그들의 집으로 출발했다. 하고 많은 날 중에 하필 눈이 오다니! 눈 쌓인 시골 좁은 길을 한밤중에 간다. 가로등 없는 시골길은 내달릴 수가 없다. 미끄러질까 봐 기어간다. 하지만 셋째 아이처럼 또다시 놓칠 순 없다. 다행히 전화가 없는 걸 보면 아직 시간이 여유로운 거다.
시골집 마당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인기척이 나자 외등이 켜지며 낯익은 남편이 나왔다. Hello! 굵직한 남편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어이쿠! 눈 오는데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라던지 '한밤중에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합니다요!'라는 말들이 함축된 말 Hello! 가끔 영어는 참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트렁크에서 꺼낼 무거운 출산 가방을 덥석 들고 성큼성큼 들어간다. 이웃집 산파가 온 것처럼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다. 아이들은 모두 자는지 집안은 조용하다. 외풍이 있는 시골집, 손수 만들었다는 벽난로엔 불이 활활 타고 있다. 평소엔 검소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진찰을 하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다행이다. 장작은 딱딱 소리를 내며 눈 온 겨울밤을 지킨다. 놓쳐질세라 두근거리며 달려온 마음과 지금의 풍경은 참 생경하다. 화장실을 열어 보이며 시골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삼각형의 월풀욕조를 보여준다. 수중 출산을 위해 남편이 선물을 했다며 미소를 짓는다. 따듯한 물을 받아 월풀 욕조에서 아기를 낳기로 했다.
한편에 채 개키지 않은 마른빨래들이 산더미다. 두 살, 네 살, 다섯 살, 일곱 살! 그녀가 낳은 아이 셋과 마음으로 낳은 아이 한 명, 모두 네 명의 아이들의 빨래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처럼 벽난로 앞에서 오랫동안 빨래를 개켰다. 엘렌은 서성이기도 하고 함께 빨래도 개키고 차도 함께 마셨다. 진통이 오는 둥 마는 둥 하릴없이 세 시간이 지나갔다. 욕조에 받아 놓았던 물은 이미 식었고 장작 불길도 사그라들었다. 엘렌은 진통이 사라진 것 같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날이 샌다. 더 고요하다. 진통이 사라져서 출산 가방을 두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이틀 후 거의 같은 한밤중, 다시 진통은 시작되었고 지난번과 똑같이 새벽에 다시 사라졌다. 두 번째 헛걸음이다. 아기가 꽤나 큰 모양이다.
5일 후, 진통이 제대로 걸렸다. 신음소리가 예전과 다르다. 멋지고 넓은 삼각형 월풀에서 엘렌은 4.6킬로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회음 손상 없이 낳았다. 요 녀석 별칭을 '삼고초려'라 지어주었다.
엘렌의 아기를 받으면서 새삼 여성의 몸이 참 신비하다는 생각을 한다. 매번 아기가 태어나고 태반이 나온 후 출혈은 거의 없다. 얼굴 모양들도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 또한 경이롭다. 그녀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눈뜬 아기를 보고 이번엔 '블루 아이즈'라며 웃는다. 엘렌의 눈을 닮은 아들이다.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나, 출혈을 하면 어쩌나 등등의 의혹과 두려운 생각들은 없다. 품어서 열 달 후면 태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이제는 당연한 거다. 나만 한편에서 일어날 확률이 없는 상황들을 상상한다. 이년마다 아기를 낳겠다고 하니 다음번 출산 때는 나도 불안을 집에 두고 와야겠다. 엘렌의 출산을 도우면서 이런 사람은 그냥 스스로도 잘 낳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혼자서 낳아보라고 했더니 예상외로 고개를 저었다. 엘렌이 지혜로워 보였다.
다시 엘렌의 집을 찾았다. 4.6킬로 아기를 낳은 지 5일 지난 그녀는 모유 수유하느라 잠을 못 잤는지 눈 주위가 퀭하다. 지난번 넷째 아기를 받고 돌아서려는데 남편은 어설픈 한국말로 '미여쿡 쪼아요! 우리 와이프 미여쿡 좋아해요!' 엘렌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잘 먹는다니 이번엔 미역국을 한 번 끓여주려 재료를 준비해 갔다. 가스불 위에서 미역국이 한소끔 끓여지는 동안 나는 아기를 살피고 목욕을 시켰다. 탯줄은 잘 마르고 있고, 충분히 먹었는지 신생아 생리적 황달은 거의 없다. 네 번째 아이라서 돌보는 어미의 손길은 프로급이지만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모유가 잘 나와서 신생아의 대 소변 양이 충분하다는 거다.
쌀밥과 미역국을 듬쁙 담아 가져다주었더니 아무 소리 없이 열심히 먹는다. 미국 친정엄마가 끓여준 닭고기 수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주 살짝' 엄마'가 생각났을 것 같다. 근처에 살면 몇 번 더 미역국을 끓여 줄 수 있었을 텐데...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운 그릇을 보니 흐뭇하다. 과연 이년 후 엘렌은 다섯째 아기를 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