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갖다 심어봐" 노쇠한 이웃 할머니가 메주콩을 건넨다. 실한 것들은 내다 파셨는지 콩들이 영 시원찮아 보인다. 정말 이 쪼그만 콩에서 싹이 나올까요? 그럼 그럼 왜 땅을 놀려 그냥 한번 심어봐. 두부도 한번 해 먹을 만큼은 나올 것이여. 소꿉장난하듯 손바닥만 한 땅을 고 노는 우리 가족에게 던지는 할머니만의 농사철학이다. 메주콩을 두 세 알씩 나누어 비탈에 심었다. 끝날 즈음 콩 여덟 개를 심어버리고 허리를 폈다. 날이 더워지고 풀들의 세상이 오면 콩인지 풀인지 모를 장관이 펼쳐질 텐데 걱정이다. 겨우 다섯 평의 노지에 콩을 심고서는 슬금, 얌통머리 없게도 괜히 할머니를 아는 체 했나 싶기도 했다. 반면 다른 집 콩처럼 내 콩도 무럭무럭 자랐으면 하는 욕심도 생긴다. 욕심은... 어쨌든, 콩을 심고 돌아와 며칠을 앓아누웠다. 콩 주인은 주인이라 할 수 없이 무심하게 3주를 보냈다. 홀로 섭섭하기도, 씩씩하게 용감하기도 했을 콩들이 간간히 생각났다. 며칠에 한 번씩 비도 왔고 구름에 뜸을 들였다가 따가운 한 낮 햇살에 아우성치며 콩잎들이 나왔겠거니 했다.
삼주만에 찾아간 시골집, 도착하자마자 비탈길의 콩을 찾았다. 해는 노을을 뒤로한 채 금세 산너머로 숨었다. 어두워지니 콩인지 풀인지 분간이 안된다. 환한 LED 랜턴을 들고 콩밭으로 나갔다. 오!!! 떡잎이 자라서 두세 칸 정도 본 잎이 나와 밤바람에 일렁인다. 당연히 풀과 함께다. 그나마 지난주 동생 댁이 일차 풀 뽑기를 했으니 망정이지, 덕분에 풀 키가 콩 키를 넘는 불상사는 면했다. 슬쩍 다른 집 콩들을 살펴보니 비슷하게 자랐다. 외려 나의 콩나무 중 어떤 것은 제법 튼실하다. 풀과 사이좋게 자라는 내 콩과는 달리 다른 집 콩은 풀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지 풀이 하나도 없다. 깜깜한 시골 들녘, 도깨비불처럼 왔다 갔다 하며 논 둑방을 어슬렁거렸다. 얼른 떠라! 해야! 콩밭을 사수하러 내가 간다!
아주 오랜만에 일어나면서 핸드폰을 찾지 않았다. 창밖이 훤해진 걸 보니 아침인 거다. 온갖 새들이 지저귄다. 건너 집 숫탉소리, 거위 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작은 것들이 참 목청도 좋다. 해가 아직 없으니 모자도 필요 없다. 이슬 맺힌 나의 비탈진 콩밭으로 갔다. 풀을 뽑아내며 콩나무에게 실하게 크려면 풀들과 친구 하면 안 된다고 구시렁대었다. 풀이 정리되니 옆집 콩나무처럼 내 콩나무도 우뚝 섰다. 보기 좋다. 기특도 하지!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들처럼, 내버려 두어도 물을 끌어오고 햇살과 버무려 싹을 티우는 너희들은 세상 둘도 없는 천재로구나!
풀 뽑는 욕심에 쉬지 알고 땅에 절을 했더니 허리를 짚지 않으면 일어설 수가 없다. 에구구구...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주춤 허리를 달랜다. 왜 풀은 손으로만 뽑아야 될까? 오른손보다 여유롭게 쉬고 있는 왼손과 두 발이 밉상이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게 왼손이 조물조물해주며 위로를 했다. 꼴랑 한 시간 풀 뽑기에 오른손 검지에 물집까지 생겼다. 여기저기 몸에 흔적이 남는 걸 보면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닌듯하다. 공짜가 없다.
뻐꾸기가 머리 위를 날면서 뻐꾹 거 린다. 날면서 뻐꾹 거리 다니... 깊은 산속에서나 들릴법한 뻐꾸기 소리가 집 전선 위에 앉아 있다. 제비도 날쌔게 날고 참새들은 오두방정을 떨며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제비 한 마리가 처마가 낮은 우리 집에 둥지를 틀려 견학을 왔다. 요즘 제비는 집안에도 둥지를 트는 진화를 했는지 거실도 둘러보고 나갔다. 이른 봄, 알을 여섯 개 낳은 토종 박새는 여섯 마리의 박새를 일찌감치 키워 내보냈다. 텅 빈 둥지에 깃털만 남았다. 이제는 해마다 봄이 되면 박새 부부가 기다려진다.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으며 정말 새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어떨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들녘은 상상만 해도 공포스럽다. 시골집에 올 때마다 날아다니는 새들은 아직은 살만하다는 증거다.
속옷을 삶았다. 뽀샤시 하게 변한 흰 속옷들을 빨랫줄에 난다. 햇살 냄새가 하루 종일 그 안에 담긴다. 바람은 금세 물기를 거두어 갔다. 가지런히 접으니 마음이 좋다. 꿉꿉한 이부자리도, 화장실 앞 러그도 햇살에 뉘고 나도 아주 잠시 그 아래 앉았다. 시골은 쉴틈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일거리다. 지인에게서 얻어온 메리골드와 수국, 이름 모를 야생화가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 수국은 홍천의 겨울을 이길 수 없을 듯하여 화분에 옮겨 심었다. 집 옆 농수로에서 물을 퍼오고 발효된 쇠똥 거름과 흙을 섞었다. 손톱 사이는 사카맣고 온몸은 여기저기 흙천 지다. 시골살이는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람도 들녘도 모두 모두 조용히 바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콩나무를 만난다. 아기를 종일 쳐다보는 엄마의 눈길에 아기가 자라듯 내 콩나무도 그런 것 같다. 잘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