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진통 걸린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 겪는 산통과 닮았다. 휘몰아쳐서 쑥쑥 내려오거나 꾸벅꾸벅 조는 쉼의 시간도 글쓰기에 있다. 아기를 낳는 절정의 시간은 글쓰기의 어느 지점일까?
책이 완성되어 손에 드리워질 때일까? 한 여성이 일생동안 아기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숫자는 10~15명이다. 반타작하여 예닐곱만 살아졌으니 일생동안 예닐곱 권의 책을 쓰는 것이 이치에 맞아 보인다. 마음을 통통 소리 나게 비우고 흙탕물 앙금이 가라앉은 맑은 윗물 같은 글은 어떨까? 모래알을 뿌리치고 솟아나는 샘물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밤이면 반딧불이가 황홀하게 난다. 이끼 사이에 소복이 고사리 가족이 사는 신비한 곳 이야기는 어떨까?
웬일인지 브런치의 조회가 심상치 않다. '아버지의 마지막 집을 치우다'의 조회수가 정신없이 오른다. 포털에 올랐나 하고 들어가 봐도 없다. 유입경로를 보면 SNS 1/3, 기타 유입이 2/3다. 좋다기보다는 덜컥 무서워진다. 몸 깊숙이 박혀있는 '소심'이다. 브런치를 시작했던 날, 단 한 번에 붙은 것에 의기양양했었다. 부케가 본케로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열심히 썼던 글들을 줄줄이 발행했다. 목표는 100개의 글을 올리는 거였다. 70개 정도의 이야기가 올려지고 써 놓았던 글들이 바닥날 즈음, 굵직한 사건 몇 개가 생긴 핑계로 글을 쓰지 않았다. 100개의 글을 쓰겠다고 했던 약속에 부담을 느낀 몸은 탈이 나곤 했다. 전공이 아니니 양으로 승부하라던 모든 글 선생들의 말을 잊은 척했다.
여름이 온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조급해졌다. 정신을 차리자. 지난 한 달간 온라인으로 모닝 스케치 글쓰기 모임에 참여 했다. 버벅거리며 날마다 쓴 짧은 글 덕분에 굳었던 손가락이 다시 춤춘다. 숨을 고르고 마음을 열어 글로 바꾼다. 쓰며 위로받고 읽으며 또다시 위로받는다.
마음의 청소부는 엎드려 쓸고 닦으며 글을 쓴다. 반짝이는 내 마음이 보인다.
대전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어떠한 모습도 받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주말 기차역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람들마다 가지가지의 이야기를 안고 간다. 착한 사람들, 마스크를 안 쓴 사람이 없다. 참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걸 그들이 알고 있겠지. 호젓이 내 시간을 보내려고 약속시간보다 세 시간 먼저 도착한다. 몰려가는 사람들을 앞으로 보내고 걸음을 느끼며 천천히 간다. 긴장하며 일로만 만나 스쳐 지나간 대전역 구석구석을 본다. 가락국수 집에 앉았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석진 앉을 곳이 필요하다. 끝 테이블에 나이 차이가 나 보이는 두 여자가 열심히 말을 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에게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해도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함이 있다. 공감은 이해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좋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 대전역사를 나왔다. 비가 올 듯 말 듯,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내 맘 같다. 아직 두 시간이 남았다.
굽어진 골목이 그대로인 옛 대전역 앞을 걷는다. 작은 커피숍에 사람이 없다. 배고파 식당을 기웃거리는 사람처럼 글이 고파 앉을자리를 찾는 내가 새롭다. 산미가 나는 아. 아를 마신다.
포항서 이제 막 기차를 탔다는 정미 샘의 문자가 왔다.
"나는 대전역 앞 작은 찻집서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소. 오랜만에 흘러가는 시간을 그대로 두고 보는 일은 생경하지만 새로운 맛이 구랴~
조심해서 오시게~"
사람 사는 일이 뭐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는 진화된 삶도 있다. 그냥, 그냥, 아주 가끔은 낯선 공기를 만나고 싶고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 모이는 우리는 그 맛을 만나러 온다.
나는 나의 지금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