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을 하는 내가 좋다.

살아가기

by 김옥진

다시 오래된 책을 집어 들었다. 17년 동안 출산에 의문이 생길 때 펼쳤던 책이다. 누렇게 바랜 책 곳곳엔 밑줄이 그어져 있다. 지나간 어느 순간에 무릎을 치며 감동하는 나를 만난다. 진화는 느리고 물건들은 재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출산이라는 고전은 갈등을 유발한다. 변하지 않은 진실에 사람들은 노랑 빨강 파랑의 색을 입히고 환호성 한다. 무채색은 가끔 세상 어느 색보다 화려히 빛나는 순간을 만난다. 종종 찰나에 내가 있다. 순간의 황홀한 빛은 지금껏 이 길을 가는 힘이 되었다.

또다시 무릎을 친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진실 앞에 더운 무더위가 도망가버렸는지 등골이 오싹하며 소름이 돋는다.


후드득, 아열대의 스콜이 바닥을 적시고 도망간다. 일을 마치고 후텁지근한 거리를 만난다. 한여름 뙤약볕이 구름에 가려지니 그래도 걸을만하다. 사거리 신호등 앞에 멈춰 섰다. 또다시 비가 온다. 집까지 여유로이 맞을 비이기를 바라며 한껏 풍성해진 벚나무 잎 아래로 들어갔다. 겹쳐진 잎들이 비를 가린다. 비를 피하려 토란잎을 꺾어 머리에 쓰고 집으로 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비 맞은 푸름의 냄새는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차들이 동서남북에서 각자의 초록을 기다린다. 서로 다른 방향에 서 있는 12대의 차가 지나가면 나의 초록 차례이다. 지금처럼 신호등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하나, 둘, 셋... 직진으로 지나가는 차 대수를 멍 때리며 세었었다. 12대의 차가 지나면 나의 초록이 밝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외워지는 것에 웃음이 난다. 그 새, 바람이 무색하게 빗방울이 굵어진다. 벚나무 그늘도 버티다 못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듬성듬성 빠져나간 머리카락 사이로 물방울이 앉는다. 수많은 물방울이 헤아릴 수 없이 나의 온몸에 내려앉는다. 열두 번째 차가 지나가자 나의 초록이 켜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온몸으로 받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여름 비 맞기를 밥 먹듯 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뛰지 않고 제 걸음으로 걷는다. 흰색 모시 재킷도, 얇은 여름바지도 하늘의 물기에 점점 제 색이 드러난다. 젖어가는 모시옷이 녹익은 나이처럼 처연하다. 실연을 한 사람이 이럴까? 아주 잠깐 슬픈 실연을 떠올린다. 격정의 젊음은 멀어졌으나 대신 덤덤히 안을 수 있는 품이 생겼다. 폭염의 일요일, 나는 비를 안았다.


인도 명상센터에서 지어준 나의 이름은 '안냐'이다.

'지혜롭고 포근한!'뭐 그런 뜻이라고 했다. 그 이름을 들으며 발음이 비슷한 우리말 '안다'가 생각났다. 안아주는 것이나 안기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공감하고 보듬는 것, 인도 이름 '안냐'는 그래서 막연하게 지금을 살아낼 지향이 되었다. 어설픈 영어로 명상 선생님께 우리말 '안다'를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둘째를 품었다는 가영 씨는 요가 선생님이다. 가끔 눈 마주침으로 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아기를 가졌다는 말에 내가 더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체를 했다.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첫 아이 출산 덕에 둘째 출산은 걱정이 없다. 그날 나는 요가원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다시 가영을 만났고 제 주수에 맞게 자라는 아기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내를 이해하는 폭이 남다른 남편, 요가와 명상으로 단련된 몸과 맘을 가진 가영, 뭐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슬쩍 가영의 아기를 받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남편과 가영은 당연히 첫아기를 낳은 곳에서 출산을 할 계획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며 가영의 둘째 마지가 순조로울 거라는 덕담을 했다.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가영의 봉곳한 배가 나의 배에 닿았다. '잘 태어날 거야 아가야' 아기에게도 내 마음을 전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가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를 안아주실 때 뭔지 모를 위로를 받았어요. 저 선생님과 아기를 낳고 싶어졌는데 받아주시겠어요?" 암요. 받다마다요. 고전을 지킨 가영의 둘째 마지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행복한 출산을 함께해서 좋다! 정말 좋다! 이 일을 하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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