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받는 조산사로 평생을 사는 것이 때론 지루해서, 힘들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넘실거렸던 다른 직업들이 있었다. 모두 다 깊게 파지 못하고, 시간을 핑계로, 일을 핑계로 또다시 본업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안긴 듯 다시 평화로워졌다. 결국 한 직업으로 평생을 보냈다. 짧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조산원을 열고 나서다. 홈페이지가 대세였던 2000년 초, 고맙게도 아기를 낳은 산모가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 아기를 받아내며 흘린 땀이 채 식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갔다. 마우스에, 키보드에, 아기 받으며 끼었던 장갑 안의 땀이 묻는다. 진통하며 나오는 신음 같은 언어 , 산고를 견디는 아내를 지켜보며 나온 진심의 말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글에 넣는다. 나의 감동도, 변해가는 출산에 대한 생각도 써넣었다. 지금의 나의 글쓰기는 아기를 낳는 엄마들이 있어 가능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아기와 엄마 이야기다. 짧은 나의 글에 주된 소재는 '임신, 출산, 행복, 감격, 사랑, 엄마, 아기, 모유'다. 어느 날 문득 나의 단어가 소진되었다. 하얀 종이를 보면 한숨이 나왔다. 저런 단어밖에 표현할 것이 없을까? 늘 인간은 각기 유니크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각각의 임신과 출산은 같지 않다고 말하면서 단어는 늘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많은 단어들 중 내가 선택하는 단어는 사전 한 장도 되지 않았다. 결국 홈페이지가 가난해졌다. SNS가 대두되면서 글쓰기는 더욱 시들해져 갔다.
2018년, 나뭇잎 떨어지는 스산한 거리에 한 공방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없는 듯 불도 꺼져있다. 커튼 사이로 깜깜한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여성들의 공방인 듯했다. 책 읽기, 버지니아 울프, 공동육아 포스터도 보였다. 그 어떤 것보다 여성들만 갈 수 있다는 문구가 마음에 닿았다. 언젠간 꼭 들어가 봐야지 하고 벼르며 지나쳐 다녔다. 일부러 찾아간 날에도 늘 닫혀 있었다. 하루는 불 꺼진 창 밖에 플리마켓 포스터가 새로 붙어 있었다. 그날엔 막연하게 공방 주인을 만날 것만 같았다. 장이 열린 토요일, 오랜만에 장마당엔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흥을 돋운다. 임시로 만든 작은 매대엔 아기자기한 것들이 즐비했다. 브로치도 사고 예쁜 꽃수가 놓인 파우치도 샀다. 어슬렁거리다 낯익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혹시, 김옥진 선생님?" 우리는 단번에 손뼉을 치며 반갑게 안았다. 5년 전 아기를 낳은 혜현 씨다. 그녀가 공방 대표였고 마을 행사를 주관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던 거다. 그로부터 햇수로 삼 년, 우여곡절의 삶은 공방의 글쓰기와 함께 흘렀다.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한 날도, 술술 풀리던 날도 엉켜 있었다. 용기를 준 공방의 사람들 덕분에 브런치와 친구도 되었다.
내 브런치를 눈여겨보았다던 잡지사 작가에게서 글 의뢰가 들어왔다. 허허! 주제는 내 인생의 산모 또는 아기, 분량은 A4용지 10 point로 반 장 정도이다. 21년 10월호에 실릴 예정이란다. 길지 않아서 마음은 가벼웠지만 수많은 산모와 아기들 이야기 중에 어떤 이야기를 쓸지 2주 동안 골똘히 지냈다. 아들 셋을 낳은, 남다른 엄마, 경희 씨의 이야기를 썼다. 글만 쓰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수정하는데 며칠 걸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습긴 해도 나름 그 과정을 거쳤다. 원고료는 10만 원, 작가 세금 3.3%를 제하고 입금을 한다고 한다. 기분이 참 묘하다. 본업으로 버는 수입에 비해서는 진짜 하찮은 값이다. 어디 가서 강의를 해도 더 많은 금액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십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이 천만 원처럼 느껴졌다. 모든 일에는 가치가 있지만 특별히 더 기분 좋은 이유는 글을 쓰는 일이 돈의 가치를 넘어선다는 생각에서다. 통장에 찍힐 숫자에 형광펜으로 줄을 쳐 그대로 보관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긴다. '첫 글쓰기 수입'이라고 쓸 메모를 볼 때마다 용기를 내 볼 거다. 부케라고 할 만한 글쓰기 실력은 아니지만 자꾸자꾸 쓰면 쓸수록 나아진다는 불멸의 법칙을 믿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