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달다.
대청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니 내가 없다. 초록이 드는 숲 속의 고려궁은 홀로 기품이 있다. 흩어져 뿌리내리던 어른 나무들이 대들보가 되고 서까래가 되었다. 나무들은 몇 살일까? 마루 바닥에 까치발을 하고 공손히 걸음을 뗀다. 삐거덕 나무소리에 냉큼 매무새를 다잡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몇 번이나 저절로 그렇게 된다. 거스르지 않는 한옥은 부드러이 모든 것을 감싼다. 찬 바람에 내려앉은 아침 이슬이 풀 끝에 달렸다. 지어내느라 애쓴 이들의 땀방울이 이슬이 되고 구름이 되었을까. 부릅뜨지 않아도 홀로 그렇게 돌고 돈다. 모였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모인다. 자연의 시간은 느린 듯 보이고 빠르지 않아도 순조롭다. 반질반질 옛 물건들이 방방이 그득하다. 제 몸 같은 귀한 보물들을 내어놓은 주인장의 마음이 보인다. 골고루 나누려는 큰 마음이 따듯하다.
문득, 이곳이 산실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들보의 기운이 아기의 성정이 되고 손 때 묻은 나비장의 기운이 아기를 키우는 곳, 바람이 친구가 되고 하늘이 이불이 되는 이곳이 아기 낳는 산실이면 좋겠다.
집에서 아기를 낳고 싶어 하는 미나는 연신 자신의 집이 좁다고 말한다. 보내온 집안 사진을 여기저기 짜깁기해서 칠판에 그려보니 뭐 그리 좁지도 않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다고, 괜찮다고, 이만하면 훌륭하다고 말했다. 평생 아기 받으며 이보다 더 좁은 장소에서도 출산을 도왔다. 외려 좁은 공간이 자연스러운 아기 마지에 더 이로울 때가 많다. 방 하나 달랑있는 오피스텔은 더욱더 좋다. 서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으며 도와주는 이가 코 앞에 있으니 산모는 든든하다. 괜찮다는 말에 미나의 걱정 하나가 덜어졌다.
진통을 하는 이에게 따듯한 물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라 지난번 만남 때 수중 출산 여부를 물었다. 물론 그들은 대환영이었다. 출산 준비를 위한 마지막 만남이 있는 오늘, 수중분만 풀을 놓을 자리, 놓는 방법 , 물 받을 호스, 설치 방법, 출산 바구니 등 갖가지 이야기로 두 어 시간이 지나간다. 그들이 한국말을 못 하고 나도 영어가 서투르니 이해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북적이지 않는 조산원에 오늘 스케줄은 달랑 그네 들 만이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큰 딸 사라도 낯설지 않은지 온통 조산원을 훑고 다닌다. 세상에서 최고인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는 밝고 명랑하다. 오랜만에 뱃속의 아기를 보니 덩달아 나의 기분도 좋다. 역시 태어날 아기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강하고 선善하다. 강해서 일어나게 하고 선善해서 보람되다. 일이라 생각지 않으니 가슴이 뛴다.
사라의 출산 이야기를 들었다. 둘이서 진통하며 간간히 조산사와 상태를 주고받다가 채 조산사가 도착하기 전 아기를 낳았다. 당황스러웠고 무서웠다고 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난 미나는 아주 컨디션이 좋았고 아기도 건강했다. 성급히 달려온 조산사의 도움으로 후 처치를 했다고 했다. 갓 태어난 양수가 묻은 아기를 안는 순간 모든 고통은 금세 잊혀져 버렸다며 신기해했다. 그런 경험을 해서인지 두 사람은 이번 출산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궁금증이 없다. 덤덤한 그들을 보니 나 역시 미나의 출산은 순조로울 거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아기를 낳는 일이 사건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라고 가슴으로 느끼는 이들이 부럽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그녀는 의료 개입 없는 건드려지지 않는 출산을 하기 위해 어렵게 나를 찾아왔다. 그녀도 내게 왜 이런 출산을 하는지 질문을 받지 않아 좋다고 했다. 조산원 벽에 쓰여 있는 "natural way"라는 문구에 남편은 엄지 척을 한다. 누군가가 조산원을 참으로 올드하다고, 고전적이라고, 심하게는 무식하다고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바뀔 수도, 바꿔지지도 않는 여성의 출산 방법은 별반 다름없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나의 첫 출산이 올드해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미련해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남편뿐인 집은 생리적인 출산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했을 것이고 자연스레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가 나왔을 거다. 아기와 엄마에게 이로운 기도 자세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나오는 자세라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출산은 원래 본능에 가깝게 올드하고 클래식한 거다. 미나의 올드 할 둘째 출산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