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음이 주는 위로

살아가기

by 김옥진

한 달에 한번 동네의 내과로 혈압약을 타러 간다. 어르신들로 북적이는 내과의 오전은 늘 분주하다. 입구에 있는 체온 측정계로 열을 재고 접수번호표를 뽑는다. 접수는 금방 하는 일이라 접수번호표의 숫자는 진료 순서보다 빠르게 오른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점점 꽉 차서 앉을자리가 없어질 즈음 걷는 보조기를 의지해 한 할머니가 혼자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접수 번호표를 뽑으라는 말귀조차 못 알아듣고는 구부정이 또다시 접수에 앉은 간호사와 눈을 맞춘다. 아직 귀와 눈과 근육이 나름 멀쩡한 내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할머니 대신 번호표를 뽑아 손에 쥐어드리고 자리를 안내했다. 할머니의 대기표 번호는 51, 빠른 말들과 번뜩이는 불빛을 따라가기 힘든 할머니는 51번의 순서가 두 개나 지나도록 자리에 앉아계신다. 또다시 사지 멀쩡한 내가 할머니께 다가가 51번 접수번호표를 간호사에게 대신 건넸다.

그 할머니와 거의 동시에 들어온 다른 할머니는 딸인 듯 보이는 보호자와 함께 들어오셨다. 딸과 함께 온 할머니는 앉는 자리며, 접수며, 일사천리로 일이 끝났다. 편안한 표정의 보호자가 있는 할머니보다 홀로 오신 할머니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 슬쩍 돌아보았다. 고맙다고 눈인사를 건네는 할머니의 미소가 가을바람이 되어 내게 전해졌다.


난생처음 남편이 위와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다. 위에서 아래로 드라마틱하게 장을 비우는 일은 예전보다 수월했다. 알약을 먹고 물을 잔뜩 마시면 연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아프지는 않냐 하니 다행히도 그럭저럭 견딜만하단다. 별 탈없이 살았기에 그리 병원 갈 일은 없었다. 접수에서 병력을 물어보는 간호사는 지금껏 한 번도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그의 보호자니까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하므로 함께 갔다. 일사천리로 검사가 이루어졌다. 작은 아기 용종을 하나 떼어냈고 다른 곳은 내가 봐도 깨끗하다. 지금껏 건강검진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마음이 쓰였는데 한결 홀가분하다. 다른 결과는 문자로 알려준다 하며 죽 쿠폰을 건네준다. 완전히 비워진 장에는 흰 죽이 제격이라 집에 가는 데로 죽을 쑬까 생각했었다. 십 년이 넘도록 한 곳에서 소화기계 내시경을 하는 병원의 작은 배려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다소 작은 공간이지만 일층에 내원하는 손님들을 위한 카페에서 죽을 먹을 수 있었다. 함께 아침을 거른 터라 나는 커피에 구운 계란 두 개를, 그는 흰 죽에 간장을 넣어 단무지 반찬 하나로 속을 채웠다. 번거롭다고 생각하면 참 번거로울 흰 죽 서비스는 죽이 주는 물리적인 이점보다 더 큰 기쁨을 주었다.


시골집에 가을이 왔다. 여기저기 손가야 할 곳이 많다. 여름 햇빛에 쑥쑥 자라 삐져나온 나무도 수형에 맞게 자르고 데크도 손보고 넥센으로 창도 만들었다. 군고구마 구울 난로도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동생이 마을의 길 고양이들이 들락거릴 작은 문을 내주었다. 고양이용 덧문을 사 온 동생은 신이 나서 나무를 구멍에 맞게 자르고 못을 박고는 허리를 폈다. 동생은 하얀색의 고양이 출입구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열심이다. 그 모습에 나도 웃는다. 구멍이 출입구 라는걸 고양이들에게 연습을 시켜야 하니 문을 열어 고정하고 안쪽으로 사료를 놓았다. 드디어 저녁이 되자 야행성인 녀석들이 사료 냄새를 맡고 한 두 마리씩 모여든다. 어미가 먼저 들어와 느긋하게 먹이를 먹고 안에서 축 늘어져 있다. 어미가 버티고 있는 곳은 새끼들에게도 두렵지 않은지 살금살금 작은 녀석들이 따라 들어온다. 역시 동물의 세계에서도 최강자는 엄마임에 틀림없다. 엄마가 있는 세상은 모든 새끼들에게 호기심천국이다. 다른 새끼들도 불러 모으려는지 평상시와 다른 소리를 낸다. 세 점박이, 흰둥이, 누렁이 두 마리, 호피무늬의 새끼들이 어둠 속에서 날렵하게 들락거린다. 내일 아침 사료는 한 톨도 남지 않을 것 같다. 올 추운 겨울은 고양이들이 바깥보다 따듯한 데크 안에서 지낼 수 있으니 내 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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