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임산부와 예비 아빠들이 출산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임신과 출산이 의료화 된 지 100년 정도가 되었는데 그 의료화 된 출산에 조금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다. 개중 아직도 자연스러운 아기맞이가 가능할까 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오는 것도 느껴진다. 아내가 왜 힘든 지, 왜 서로 사이가 좋아야 하는지, 출산의 인위적 개입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긴긴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모두들 모범생처럼 잘 들었다. 세 시간의 교육이 그들의 생명 맞이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질지 의문은 들지만 처음 들어왔을 때의 눈빛과 교육을 마친 그들의 눈빛은 확연히 다르다. 봉긋이 자란 아내의 배가 생명임을 더 명확히 알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유전자 분신임을, 그래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알았다. 뭐니 뭐니 해도 아내를 바라보는 따스함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서로 반대의 성향인 유전자가 합쳐져 서로 보완되고 돕는 또 다른 생명체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아! 내가 아버지로구나! '
정말 별거 아닌 듯 여겨지지만 그들은 이미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인사를 하고 나가며 아내 등에 얹힌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것을 말해준다. 세 시간 내내 나는 그들과 눈을 맞추었다. 주고받는 것이 말 만이 아님을 눈 맞춘 사람들은 안다. 경이로움의 극한은 출산이다. 사람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을 함께하는 것은 삶의 또 다른 발돋움이다. 숙성되며 진보되는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확장시킨다. 잘 낳으려면 튼튼하고 건강해야 된다. 좁은 조산원에서 걷기 훈련을 했다. 대부분 발 뒤꿈치를 살짝 들고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성큼성큼 다시 걸으라고 했다. 대단한 발견을 한 사람들처럼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머나! 그렇게 걸어야 해요? 절도 시켰다. 절이라고는 결혼식 폐백을 할 때나 명절에 어른들께, 일 년에 한두 번 할까 말까 하는 전통의례다. 절은 존경과 감사, 겸손을 알게 한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존경하며, 지금의 이 순간에 감사하고, 스스로 잘 자라는 아기를 보며 겸손함을 배운다. 두 번 절을 시키니 여기저기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만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열심히 걷고, 절 하며 보낸 임신 기간은 그들에게 좋은 결실을 선물할 것이라 했다. 내일부터 얼마나 운동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내게 알리라 했다. 바빠지겠지만, 그래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