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배신

아기를 낳다

by 김옥진

해와 달이 맞바꿔지는 어스름 저녁 난 시골에 와 있다. 해가 지자 가느다란 달이 산허리를 천천히 기어오른다. 달이 동그랗게 커지면 태중의 아기들이 들썩이기 시작해서 실 같은 초승달은 내게 안식처럼 느껴진다. 물 가득 찬 찰랑이는 논엔 어둠과 함께 개구리들이 목청을 돋운다. 내일은 음력 오월 오일, 창포에 머리 감는 단오날, 기억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좋다. 그믐의 밤, 아무도 없는 길 위, 밤공기에 머릿속이 깨끗이 리셑된다. 느낌 좋은 오늘 밤엔 눈썹 같은 달을 억지로라도 믿어보기로 했다. 온전하게 밤을 보내고 싶다.

악몽을 꾸었다. 나의 깊숙한 분노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꿈에서조차 소리를 쳐댔다. 주먹을 불끈 쥐고 내리쳐 부숴버리는 꿈속의 공포스러움에 눈이 떠졌다. 뭐가 그렇게 분하고 억울한 걸까. 내려놓아도 좋았을법한 마음은 여전히 버거운가 보다. 심장박동은 후다닥 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개구리들도 여전히 시끄러운 것을 보니 한 밤중, 식은 몸을 이불속으로 넣었다.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았다.'선생님, 저 양수가 나와요' 정신이 확 깬다. 여기가 어디지? 아, 시골집이구나, 뭐 양수가 나온다고? 몇 시인가? 새벽 세시반!

두어 시간 잠이 들었다가 꿈만 꾸다 깨었다. 진통은 아직 없지만 넷째 아기이니 서둘러야 한다. 본능은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한다. 또다시 한밤중을 달려간다.


나를 기절하게 만든 그 여자, 태어나는 아이마다 출혈을 어마어마하게 했다. 만약에 셋째 소식이 온다 해도 셋째는 받지 말자고 나 혼자 선언을 했다. 혹시라도 잊을까 봐 차트에 대문짝만 하게 써 놓기까지 했다. 둘째를 낳은 지 삼 년 후 셋째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안돼, 이러다 '그 놀람'에 내 생명줄이 줄어도 한참은 줄 거야! 어쩌면 이미 줄었을지도 몰라! 안돼 안돼 안돼...'이번엔 병원 가서 낳으세요' 꿋꿋하게, 단호하게 물리쳤다. 다행히도 잠잠했다. 달이차자 그 여자는 또다시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곳은 없다며 아기를 받아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결국 출혈에 대비한 후 셋째 아기를 받아냈다.


사실 그들의 요구는 별거 없다. "불필요한 의료적 처치를 산모나 아기에게 하지 말아 달라. 아기는 낳자마자 가슴에 안겨주고 바로 젖을 물려달라. 아기와 떨어지지 않겠다. 즉 신생아실에 보내지 않겠다. "

이것이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내게로 아기를 낳으러 오는 이유다.


원만히 낳은 셋째, 넷째가 생기면 또 받아내야 할까?

자꾸만 첫아이와 둘째 아이를 낳으면서 각인된 트라우마는 그녀에게서 오는 전화받기를 망설이게 했다.


올커니, 지난해 가을, 넷째 소식이 왔다. 여전히 그녀는 150km나 떨어진 먼 곳에 살고 있다. 무난했던 셋째 출산, 그렇다고 출혈이 없었던 건 아니어서 또다시 무서워졌다. 병원으로 가시라 해도 안 갈 것은 뻔한 일, 누군가는 쉽게 '그 사람 아기는 안 받으면 되지!'라고 말할 거다.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이번 넷째는 얼굴 한번 안 보고 달이 찼고, 달이 점차 차오르기 시작하는 오늘, 지금, 넷째의 양막이 열렸다. 달려가는 차 안에서 또다시 굳세게 마음을 먹는다. 천지신명,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이여! 이 생명을 돌봐 주소서!


오월 오일 단오날 아침 여덟 시 구분!

또다시 피범벅이 된 아기는 가녀린 생명줄을 잡고 우렁차게 울음을 터뜨렸다.

내 심장은 쪼그라들고 지쳐 벌떡거리다 잠잠해졌다.


달은 가끔 배신을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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