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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Oct 10. 2023

연필에 대한 단상2

일상

볼펜은 말 그대로 볼 ball과 펜 pen이 합쳐진 단어다.

펜 끝에 있는 볼 덕분에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잘 써진다. 마치 얼음 위의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진다. 연구자들은 힘들이지 않고도 쓸 수 있는 필기구를 매 순간 고민한다. 덕분에 펜들은 교묘히 변화하고 진화된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문구점은 참 재미있다. 우리 네 식구도 문방구 이야기만 하면 빨리 가자고 모두들 성화를 부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문방구. 아마 문방구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엄마 손을 잡고 문방구에 온 어린이들의 눈이 그렇게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재깔거리며 들어서는 여학생들의 몸짓에서 두근거림을 감지한다면 아직 청춘인 거다. 나의 심장박동이 느껴진다면 더더군다나.

광화문의 교보문고나 종로의 영풍문고는 늘 남녀노소의 놀이터다. 기상천외한 펜들로 진열된 코너는 제일 인기가 많다. 누구보다 먼저 신상품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뭐라 표현할 수 없다. 방금 태어난 첫아기를 만지는 순간과 비교하면 너무 과한가. 맛보기코너엔 온갖 글씨들이 춤을 춘다. 지나친 사람들의 즐거움이 내게로 마구 달려온다.


선물 받은 연필로 열심히 필사를 하고 있다. 볼펜으로 글 쓰는 것이 만성화되어 사각거리는 연필감각이 영 낯설다. 연필은 볼펜처럼 흘겨 쓰게 되면 너무 연하다. 눈이 침침해진 나이라 또렷한 글씨가 좋다. 난생처음 글씨를 썼을 때처럼 힘주어 잡고 눌러써야 확연한 글씨가 된다. 볼펜으로 썼더라면 벌써 한 페이지를 넘게 썼을 텐데. 시간도 힘도 더 드는 연필을 왜 쓰고 있을까? 레트로가 유행이라서? 유행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왜 연필을 잡았을까? 눈으로 책을 읽고 머리로는 온갖 생각이 떠돈다. 왜?

연필을 쓰면서 왜 이리도 복잡한 감정이 드는 걸까?

마음을 바르게 놓아두고 숨을 깊게 쉰다. 그리고 다시 쓴다. 연필로.

지렁이 모양으로 흘려 썼던 ㄹ은 3획으로 또박또박 쓴다. 구부러지는 코너도 90도의 각을 잡아야 세종대왕님에게 칭찬을 받을 것 같다. 같은 3획인 ㅁ도 마찬가지다. ㅁ인지 ㅇ인지 두리뭉실 쓰는 것은 연필이 용서치 않는다. 이것도 90도 각을 지켜야 예의 바른 한글이다.

4획인 ㅂ은 볼펜의 등장으로 2획이 돼버린 지 오래다. ㅂ도 획수에 맞추어 또박또박 쓴다.


마음이 흔들리면 붓이 제멋대로 써지듯 한글도 마음을 다해 써야 뜻도 마음도 전해진다.

왜 연필을 쓰냐고 묻는다면?

천천히 살피려고, 서둘다 놓치는 것들을 주워 담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의 글이니까.


바쁘면 볼펜을 다시 집어 들지 모르겠다. 그래도 친구와의 약속대로 한 자루의 연필이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는 써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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