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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Nov 17. 2023

내겐 너무나 소중한 서리태

홍천 텃밭일기

홍천 들판에 가을비가 내린다. 겨울로 접어들고 있지만 비와 어울린 흙에서는 봄 내음 비슷한 향기가 난다. 깊은 가을의 향기는 흙냄새와 어우러질 때 더욱 감미롭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다.

야무진 동생 댁은 겨우내 동면할 칸나 뿌리를 정리하고 나는 서리태를 정리할 예정이다. 데크에 널어놓은 서리태를 볼 때마다 밀린 여름방학 숙제를 해야 하는 학생 마음 같았다.

원래 콩들은 통째로 베어 햇살에 바싹 말려서 타작을 하면 손쉽다. 소꿉놀이하듯 농사 흉내만 내는 우리 콩은 타작을 할 만큼 많지 않다. 천상 하나하나 손으로 까는 수밖에.

한 여름, 마당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뽑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셨던 오이 아저씨가 떠올랐다.

"거 풀 못 이겨요!  그냥 제초제를 뿌리는 것이 나아요!" 이번에는 "에이 그걸 일일이 언제 손으로 까요. 양이 적더라도 도리깨질을 하는 게 낫지요." 어설픈 시골 살이를 하는 우리를 보고 얼마나 웃으실까!

아저씨가 볼 수 없는 집안에서 콩을 깔 예정이니 아저씨의 훈수는 내년 여름에서나 듣게 될 것이다.



서리태는 여느 콩들과는 달리 서리가 온 후 거둔다고 한다. 이른 서리를 맞고 거두는 작물이라서 이름도 서리태란다. 들판이 삭막해져도 서리태는 굳건히 콩들을 깍지 안에 품고 있었다.

서리태와는 다르게 노랑 메주콩의 콩깍지는 진즉에 비틀어져 파마한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처럼 변한다. 거두기도 전에 이미 콩을 바닥으로 내보내기 일쑤이다. 물론 거두는 시기를 모르거나 놓쳐서 그럴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심었던 메주콩의 실적은 해마다 저조했다. 때를 놓친 메주콩에는 곰팡이도 슬고 벌레들 먹이도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간신히 씨앗 할 것들만 거두어도 즐거웠다.

하루 종일 콩나무에서 콩깍지를 떼어내고 깠다.

노랑 메주콩보다 양도 많고 제법 실하다. 넓은 쟁반에 자태를 뽐내는 서리태가 채워진다. 바닥에 떨어져 나간 콩들도 하나도 남김없이 쟁반에 주워 담았다. 농사를 지어보니 콩 한 개조차도  얼마나 소중하던지.

햇살과 바람, 소나기가 키워준 콩깍지 안의 콩세알, 손가락은 슬슬 아파지지만 저절로 나오는 감사의 감탄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2.63킬로의 서리태가 모아졌다. 나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서리태에게는 가격을 논하고 싶지 않다.

내겐 너무나 소중한 서리태, 두고두고 한 줌씩 밥에 두어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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