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밤이 되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고 길 위에는 살얼음이 얼 수도 있다. 비도 눈으로 변신할 것이다. 365일 아기를 기다리는 조산사인 나는 궂은 날씨에 아기가 태어날까 봐 늘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날씨가 험할 때에는 아기가 태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번에 태어날 아기는 출산 예정일이 벌써 5일 지났다. 언제던 진통 소식이 올 수 있으므로 하루하루 신경을 쓰고 있다. 산모와 나는 화창하고 편안한 날에 아기가 태어나기를 바랐다. 그동안 수없는 무언의 기도가 오고 갔다.
나는 산모에게 열심히 태담을 하라고 권한다. 밝고 맑은 날에 태어나라고 아기에게 이야기를 해주라고 말이다. 임신한 엄마가 진심으로 하는 태담에 반응하는 아기들을 종종 보아왔다. 눈이 오는 날에 만나자고 한 아기는 폭설과 함께 태어났고 아빠 있을 때 태어나라던 아기는 아빠가 일을 마칠 때까지 태어나지 않았다. 비로소 아빠가 도착하고서야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신비를 무어라고 설명할까? 과학만능인 세상도 아직 출산의 신비를 밝히지 못했다.
산모는 집에서 아기를 낳고 싶다고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면 출산의 장소로 최적인 곳이 집이다. 낯선 곳에서 자식을 낳는 문화는 고등동물인 사람에게만 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조산사는 산모의 바람을 최대한 들어준다. 나는 건강한 임신기간을 보낸 그녀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진통이 시작되면 우리 집에서 300킬로나 떨어져 있는 산모의 집으로 가야 한다. 왕복 600킬로를 달리겠다는 의지가 부록처럼 포함되어 있다.
드디어 두 시간 전부터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고 연락이 왔다. 아기가 제대로 태어난다면 이틀 후에 강의 일정도, 다음날 김장을 하기로 한 계획도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는 일정은 계획할 수 없기에 누군가의 진통이 시작되면 모든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이번 산모의 출산 계획이 틀어지면 어쩔 수 없이 강의도, 김장도, 차순위로 밀려난다.
진통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니, 착착 맞아떨어지게 하신 신의 일정표에 감동이 몰려온다.
초산이니 좀 더 지켜보고 출발해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궂은 날씨라면 길이 얼기 전에, 비가 눈으로 바뀌기 전에 미리 가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준비해 온 출산 가방을 다시 점검하고 길을 나섰다. "참, 그 직업 참 얄궂네. 이 밤중에 일을 하러 가다니. " 배웅 나온 동생이 잘 다녀오라 손을 흔들며 중얼거린다. 맞다. 내일은 참 얄궂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직업, 조산사다.
출발 시간은 밤 열 시, 태백산 줄기를 따라 나 있는 중앙고속도로를 달린다. 지대가 높아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밤길이라 더욱 조심스럽다. 다행히 비가 눈으로 변하지는 않았지만 골짜기 사이로 허연 안개가 넘실거리며 차를 덮치면 순간엔 등골이 오싹했다. 짙은 안개가 숨어있는 커브길은 그중 최고로 무섭다. '뭣이 중헌데!' 사고라도 날 경우 제일 괴로운 사람은 나다. 조심조심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달린다.
치악 휴게소 편의점을 들렀다. 따끈한 쌍화탕을 제일 먼저 골랐다. '내 몸을 챙기는 것이 곧 다른 이를 위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탓이다. 군것질거리로 밥풀 뻥튀기, 땅콩 캐러멜도 집어 들었다. 긴장한 탓인지 속이 불편해서 그 이름도 정겨운 부채 표 활명수를 그 자리서 바로 마셨다. 마시자마자 트림이 나오면서 속이 편안해졌다.
산모는 진통이 계속 오고 있을까? 내 마음과 통했는지 산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아까 통화할 때만 해도 진통이 세 시간가량 규칙적으로 왔었는데 지금은 급기야 사라졌다고 했다. 나는 이미 산모의 집 근처에 다달아 있었다. 0시 30분이다. 미안해서 쩔쩔매는 산모에게 이런 일들도 가끔씩 있으니 일단 아침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혹시라도 새벽녘에 다시 진통이 올 수도 있기에 산모집 근처에 있는 숙소를 골랐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모텔에 들어갔다. 한밤중에 모텔을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다. 피곤이 몰려온다. 아침 녘엔 산모에게서 긍정적인 소식이 오기를 바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핸드폰부터 확인을 했다. 연락 온 곳이 없다. 이번 태어날 아기는 아주 느긋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산모를 보고 가기로 했다. 마침 산모는 진통이 걸리라고 운동하러 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비와 안개로 가득했던 궂은 어젯밤과는 달리 하늘이 청명하다. 뱃속 아기도 엄마와 함께 나무도 보고 흙도 밟고 새파란 겨울 하늘도 만났으리라. 그 기운을 받고 오늘은 꼭 태어나기를 바란다.
산모의 집은 신혼 냄새가 났다. 베란다에는 화초도 가득한 것이 하나하나 정성 들여 키운 마음이 보였다. 만삭인데도 날렵히 물을 끓여 보이차를 내 왔다. 뜬금없지만 차가 담긴 청천색의 투박한 질그릇 컵이 멋있어 보였다. 우리는 밤새 일어났던 진통에 대해, 지금의 마음에 대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예상밖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진찰을 했다. 예상보다 아기는 크지 않았지만 자궁문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진통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크게 기대는 안 했지만 속상한 마음이 올라왔다. 나도 속상한데 산모는 오죽할까! 하지만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그럴 수도 있으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열심히 다시 걸어보라고 했다. 씩씩하고 당당한 품성의 그녀는 그러겠다며 다시 각오를 다졌다.
현관문을 나서며 산모를 꼭 안아 주었다. 내 마음이, 내 손길이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다시 300킬로를 달려 집으로 왔다.
다음 날, 강의도 잘 마쳤고
또 그다음 날, 30 포기 김장도 마무리하였다.
그동안 나의 마음 한편에는 계속 산모가 자리했다.
산모의 집을 다녀온 지 삼일이 지났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진통은 없는데 새벽에 양수가 나왔다고 했다. 이제는 집에서 출산하길 바라던 꿈은 접어야 한다. 때론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고 재빨리 방향을 전환하는 게 중요할 때도 있다. 가끔씩 낮동안 그녀와 통화를 했다. 여전히 진통다운 수축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또다시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말라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점점 더 자연 출산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씩 양수는 계속 패드를 적시고 있다. 양수의 양은 아기가 건강한지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라서 점점 더 걱정이 된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진통다운 수축은 없다. 이제는 자연출산을 위한 무게를 내려놓고 다음 단계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최대한 그녀가 행복하게 아기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조산사의 임무 중 하나이니까. 우리는 출산장소를 집에서 병원으로 변경해야만 했다.
유도분만을 해야 하는 것이 다음 순서다.
아직 여지는 남아 있으니 자연출산에 대한 의지는 좀 더 붙잡아보자고 했다.
무엇보다 아기에게 무리수를 두지 않는 유도여야 한다. 강력하지 않고 부드럽게 밀어내려면 유도제의 용량도 최소화해야 한다. 그녀는 병원 분만실에 입원을 했다.
그녀가 원하고 내가 아기를 받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린 가정출산은 이제 할 수 없다. 초산의 출산은 이런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해서 경산보다 힘들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산모의 출산을 기다리며 누군가와 정확한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조산사라는 직업은 역시나 평범하지 않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오늘은 날씨가 따듯하다. 밭 한편에 세워놓은 참나무에서 아기 버섯이 나왔다. 표고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추운 늦가을의 공기를 무릅쓰고 자랐다. 사방의 생물들은 나름의 생존 전략이 있다. 내가 만나는 아기들과 산모들처럼.
조산사로서 할 수 있는 게 이젠 기도밖에 없다. 600킬로를 오간 나의 마음이 산모에게도 자그마한 힘이 되었기를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