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옥진 Dec 17. 2023

병아리 사랑이 시작되었다.

일상

선물 받은 계란 두 판은 마치 유정란처럼  보였다. 금방 닭이 낳은 것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껍질도 거칠하다.

"엄마 저것 유정란이야"

"글쎄 유정란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근데 꼭 유정란 같아 보이기도 해. 왜 어릴 적 했던 일을 또 하려고? 아서라! 딸!"

유정란이냐고 묻는 딸이 수상쩍었지만 설마, 나이가 몇인데 알을 부화시킬 생각을 할까 싶다. 1%의 가능성도 없을 거라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마음을 잡았다. 더 이상의 유정란에 대한 대화는 없기를 바랐다.


2주가 지났을까?  딸이 부산스러운 낌새를 풍긴다. 평상시 같지 않게 자꾸 왔다 갔다 하면서 전기장판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 게다가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엄마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 같이 눈 맞춤도 피한다. 설마! "너 이상한 짓 하지 마라! 더 이상 사람 이외의 동물은 없다! 응!"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후다닥 제 방으로 들어가는 뒤통수만 보인다.

우리 집 애완동물들은 대부분 큰 딸이 데려왔다.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족들은 고양이 세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 집사가 되었다. 하지만 집안에 굴러다니는 동물의 털을 청소하고, 가끔씩 하는 실수를 치우는 일은 데려온 사람보다 다른 가족들이 더 많이 했다. 그런 일들로 종종 다툼도 일고 서로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서로는 차츰 가족이 되어갔다. 평생 동물을 키워보지 않은 남편은 더욱 어색해했으나 함께한 시간이 벌써 10년이 지나간다. 이제 그는 밖에서만 용변을 보는 웰시코기를 위해 하루 다섯 번 이상 산책을 나가고 코기랑 말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코기는 밤이 되면 내 침대 발치에서 잔다. 든든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매일 숙면을 취한다.


살면서 고양이 둘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가족이었던 녀석들을 보내는 일은 힘이 들었다. 슬픔의 감정이 얼마나 인생에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이런 일들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녀석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 슬픔의 총량이 좀 작아졌지 않았을까.

이제 집에 남아있는 코기와 길고양이도 나보다 짧은 인생을 살 것이다. 그러나 녀석들이 나보다 먼저 가는 것은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사라진다거나 헤어지는 것 등은 아직도 내게는 버거운 일이다.


병아리의 부화 사건이 망각의 그늘로 들어갈 무렵  택배가 배달되었다. 딸은 두루뭉술한 태도로 반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뭐가 들었냐고 물었더니 유정란이라고 한다. 나의 촉이 번쩍였다. 너! 혹시?"

딸방으로 들어갔다. "너! 지금 사고 치고 있는 거 맞지? 유정란이니 뭐니 하는 질문을 하는 본새가 수상타 했어. 저게 뭐니? 구석에 있는 박스, 어머 얘 좀 봐?"

박스를 열었다. 저런! 부드러운 행주 위에 계란 다섯 개가 놓여 있다. 오도 조절기가 38도를 가리키고 있고 가습기에선 훈훈한 공기가 뽀얗게 시야를 가리고 있다.

"너 부화기까지 산 거야?

아니요! 전기장판만 깔고 온도만 맞춰주고 있었어요. 지난번 계란 두 판은 유정란이 아니더라고요.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가 없었어요. 그래도 혹시 조금 자랐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잘 가라고 땅에 묻어주고 이번엔 유정란을 산 거죠. 그런데 잘못해서 두 박스나 배달 되었지 뭐예요. 한 박스는 반품할 거예요"

먼저 배달된 유정란 다섯 알은 떡하니 온도계까지 갖춰진 박스 안에서 열흘째 자라고 있었다. 나 모르게 병아리 부화 작전은 비밀리에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졌다 졌어!

ㄷㄷㄷㄷㄷ

삼십 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계란을 따듯하게 해 주면 병아리가 된다며 꼼짝 않고 계란을 품고 있었던 아홉 살 딸아이. 계란을 배에 품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얼마나 웃었던지. 그때는 어려서 귀엽고 사랑스럽기나 했지. 아, 근데 지금은 초등생이 아니잖아요.


부화가 시작된 알을 내다 버릴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 뭐 이제는 계란을 먹는 것이 미안하다나 뭐라나. 채식주의자를 하려면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하는데 너무나 고기를 좋아하면서 저런 말을 하다니. 나는 고민을 했다. 그리고 '결자해지'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매듭을 묶은 자가 해결을 하는 것. 병아리를 아파트에서 키우는 것은 안된다. 궁지에 몰린 딸의 궁색한 해결책은 병아리를 부화시킨 후 친구들에게 분양을 하는 것으로 임시 마무리를 지었다. 참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삐약 거리는 병아리 소음과, 닭똥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그 사이 가족들이 겪어야 할 불편함은 어찌 보상을 할 건지에 대한 잔소리는 여전히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알이 병아리로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 가족은 60계 치킨을 두 번이나 시켜 먹었다. 미안하게도 맛있게 먹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놀랄 일이 생겼다.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것이 나의 호기심을 슬금슬금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도 계란이 어떻게 병아리로 부화하는지 궁금하다.  늘 꿈꾸고 있던 시골 살이 중 하나는 들판에서 닭을 키워 알을 갖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 병아리들을 잘 키운다면 내년 봄쯤엔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데 말이야, 정말 이건 아니잖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의 의중을 잽싸게 알아차린 딸은 그동안 유튜브로 익힌 알의 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은 계란을 까보면 빈 공간이 있는데 병아리들의 머리가 그쪽으로 있어야 정상으로 태어난다든지, 삐딱하게 있는 경우엔 부화가 잘 안 된다든지, 사람 아기처럼 거꾸로 앉아있는 병아리들도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어머 어머 사람이랑 비슷하네. 위치가 좋지 않으면 아기들도 잘 내려오지 못하거든. 정말 신비스럽다!" 내가 슬슬 딸의 술수에 걸려드는 싸한 느낌은 뭘까. 급기야 반품해야 할 다섯 개의 유정란도 더 부화시켜 보자라고 말해버렸다.

결자해지'를 약속받는 순간에도 이미 엉성하게 만들어진 산란실의 알에서는 혈관이 만들어지고 심장이 자리를 잡았다. 나도 밤새 병아리들이 얼마나 자랄까 궁금함을 품은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산란실의 뚜껑을 열어보며 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어미닭이 없으니 일일이 사람이 알들을 굴려줘야 한다. 아기를 돌보듯 딸은 부화기 옆에서 알을 굴려주며 쪽잠을 잔다.

"부화가 되는 시기는 어미닭이 알을 품기 시작해서 21일 정도에 껍질을 까고 나온데요. 이제 삼일 남았어요"

부화될 날이 지나면 안 되는 건가? 사람도 출산 예정일을 잘못 잡는 경우가 있는데 병아리는 어떨까?

사람 아기들도 스스로 때를 알고 알아서 태어난다. 자연스레 부화할 수 있도록 눈만 부릅뜨기로 했다.

호기심을 억누르기로 했지만, 나도 모르게 하루에도 몇 번씩 부화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딸이 발꿈치를 들고 콩콩거리며 뛰어온다."엄마 엄마 엄마! 알이 조금 깨졌어요!" 온 가족이 부화장에 만들어 놓은 관찰용 구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오! 부화 예정인 계란 중 하나에 0.2밀리 정도 금이 가 있다." 힘내라 힘! 잘하고 있네. 기특도 하지! 건강히 잘 나와야 해!" 저마다 고요히 덕담을 건넨다. 그날 하루 동안엔 아예 부화 통 옆에 붙어 있었다. 왜 이리도 더딜까, 조바심이 하늘을 찌른다.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진다. 알이 깨진 곳이 넓어지자 병아리의 얼굴이 보인다. 가끔 삐약 거리기도 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흔들어 댄다. 여전히 양 날개와 척추, 다리는 알에 들어있다. 내가 밤새 잠을 자는 시간에도 병아리는 안간힘을 쓰며 알을 박차고 나올 것이다. 그냥 두어도 잘 태어날 것이다. 내게도 중얼중얼 안심을 시켰다. 아기를 기다렸던 수많은 시간처럼.

아마 병아리 꿈을 꿀 것만 같다.


꿈엔 병아리를 보지 못했으나 눈을 뜨자마자 부화기를 보러 갔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털을 가진 작은 병아리가 널브러져 있다. 양수에 싸여있던 아기가 태어나면 나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양수를 닦는다. 얼른 체온을 유지하라고 엄마의 가슴에 올려주는데 알에서 깬 병아리는 엄마도 없고 물기를 닦아줄 그 무엇도 없다. 아주 조심스레 딸이 엄마 역할을 했다. "응 그래그래, 고생했어. 이쁘기도 하지" 만지면 깨질듯한 작은 생명체는 사람의 손길에 놀라 삐약 댄다. 탄생의 흔적인 계란 껍데기도 저만치 굴러다니고 떼어진 양막에 혈흔도 보인다. 탄생의 현장에서는 누구나 기적을 경험한다. 이것은 기적이다. 아주 드물게 2센티밖에 안 되는 날개도 푸덕인다. 용을 쓰고 나면 힘이 드는지 고개를 땅에 박고는 순식간에 잠을 잔다. 가슴 쪽의 심장은 여전히 가쁘게 뛴다.


병아리 사랑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엄마가 되다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